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다문화 사회

윤의사 2010. 1. 23. 21:47

경향신문 '여적'에 실린 박성수논설위원의 글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국민들은 다문화가정에 소홀하거나 심지어 차별하기가지 합니다.

이제는 그들을 우리 국민으로 따뜻하게 맞이해주어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이제는 글로벌 사회를 지향하는 만큼 더욱 포용하는 마음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경향신문 '여적'을 보면 우리나라는 예날부터 다문화사회임을 알 수가 있답니다.

 

고려말 정몽주, 이색 등과 더불어 고려십은(高麗十隱)으로 불리던 이맹운이라는 선비가 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칩거해 충절을 지켰던 곧은 선비였다. 그런데 이맹운의 족보가 흥미롭다. 본관은 화산(花山) 이씨로, 베트남에서 귀화한 이용상(李龍祥)의 6대 손이다. 이용상은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 왕조의 왕족이었다. 난이 일어나 가족이 몰살당하자 바다로 탈출해 표류하다 서해안 옹진반도 화산에 도착한다. 당시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가 섬사람들과 함께 몽골군을 물리친 사실이 알려지자 고종은 화산 일대를 식읍으로 내리고 이씨 성을 하사했다.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연유다. 고려는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내자불거(來者不拒)’ 정책을 실시해 귀화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선 이씨도 이양혼을 시조로 하는 베트남계이고, 충주 매씨와 남양 제갈씨는 중국 성이다. 몽골계인 연안 인씨, 여진계인 청해 이씨, 위구르계인 덕수 장씨, 일본계인 우륵 김씨 등이 모두 고려시대 귀화 성이다. 베트남인은 외국인이지만 그래도 우리와 모습이 비슷한 동양인이다. 이목구비가 확연히 다른 서양인으로 처음 귀화한 사람은 조선 인조 때 박연(朴淵)이다. 네덜란드 뱃사람이었던 그는 일본으로 가던 중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 관원에게 붙잡힌 후 귀화했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조선 여성과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통역을 했다고 한다. 지난해 2만5000여명의 외국인이 우리나라로 귀화해 정부 수립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중국인이 78%로 가장 많았고 베트남인, 필리핀인이 뒤를 이었다는 통계다. 외국인노동자가 늘어나고 한국인과의 결혼도 많아지면서 귀화도 증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현우라는 방글라데시인은 한국 여성과 결혼해 부인의 성을 차용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도 시흥의 시화호를 본관으로 ‘시화 유씨’를 창설했다고 한다. 다문화가정이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관광공사 사장 이참씨처럼 관공서 수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귀화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들 자녀까지 이방인 취급을 하는 풍토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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