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대표적인 평민 출신 의병장이다. ‘태백산 호랑이’ 혹은 ‘신장군’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신돌석의 뛰어난 활약은 일반 농민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고, 이후 평민 의병장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신돌석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신돌석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뜻을 펴고자 사방으로 동지와 스승을 찾아 다녔다. 점차 신돌석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의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신돌석도 그동안 사귀어온 동지들을 모아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을 일으키다
신돌석은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싸울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 지역 의병 부대 중군장이 되었다. 신돌석은 다른 의병 부대와 힘을 합쳐 영덕 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신돌석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돌석은 이후 10여 년 동안 전국 곳곳을 다니며 다시 동지들을 모았다. 그러면서 혼자 때로는 활빈당과 함께 항일 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을사조약이 맺어진 다음 해 신돌석은 고향 영해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신돌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1907년 겨울부터 신돌석은 산간 벽지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곳곳에서 무찔렀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다
1908년 겨울 신돌석은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께신돌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취하게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신돌석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이 신돌석의 목에 건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신돌석은 자신보다도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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