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종교를 통해 민족혼과 독립 정신을 심어 주었으며,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불교를 개혁하고 일반 백성들이 가깝게 느끼도록 대중화시키는데도 앞장섰다. 본명은 정옥,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이다. 한용운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사회에 비판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세상일에 일찍 눈뜬 속깊은 아이였다. 가족들이 갑오 농민 전쟁 도중에 농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자,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다. 또한 뒤이은 청일 전쟁을 겪으며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눈을 뜨면서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 뒤로 만주, 간도 등을 다니며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가,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조선 불교를 지키고 개혁하는 데 앞장서다
한용운은 친일파 승려인 이회광이 조선 불교를 일본식으로 바꾸려 하자 전국의 승려들을 송광사로 불러모아 반대하는 대회를 열었다. 1910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써서 한국 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어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조직을 정비하고, 불경을 읽기 쉽게 만든 <불교대전>을 완성하여 일반 백성들이 불교를 가깝게 느끼게 하였다. 1916년에 창간한 월간지 <유심>은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면서 민족 정신도 아울러 높여 주었다.
문학과 종교를 통해 독립 운동에 힘쓰다
한용운은 3.1운동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공약 3장을 덧붙이고, 민족 대표들이 모인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직접 낭독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살이를 한 뒤, 그는 항일 운동에 더욱 힘썼다. 1926년에 ‘님의 침묵’이라는 저항시를 발표하여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에 불을 지폈고, 이듬해에 신간회에 들어가 서울 지역인 담당하며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바꾸어 불교 청년 운동을 이끌고, 잡지 <불교>를 인수해 펴내면서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 사상을 북돋우는 글들을 많이 실었다. 1935년부터는 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그 이듬해에 자신이 이끌어 오던 불교계의 비밀 항일 단체인 만당 사건으로 붙잡혀 다시 감옥에 갇혔다. 한용운은 그 뒤로도 일제가 학병을 모집하는 것에 반대하는 등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해방을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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