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지략으로 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독립 전쟁 역사상 가장 큰 승리로, 일제의 폭압에 억눌려 지내던 우리 겨레에게 용기를 주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 자는 명여, 호는 백야이다.
김좌진은 부유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 전쟁 놀이를 즐겨 했는데, 약한 편을 도와주기를 좋아했다. 열다섯 살 대에는 자기 집 노비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준 뒤 모두 풀어 주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육군 무관 학교에 들어갔고, 애국 지사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국을 위해 일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백성을 깨우쳐 나라를 구하려 하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호명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90여 칸자리 집을 학교 건물로 내놓고 자기는 초가집으로 나가 살았다. 또한 대한협회의 홍성지부와 기호흥학회를 만들어 백성들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1909년에는 <한성신보> 간부를 맡고, 안창호 등과 서북학회를 만든 뒤 오성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교육 운동만으로 나라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김좌진은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자금을 모으기 위해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 김좌진은 비밀 단체인 광복단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청산리 대첩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다
1918년에 김좌진은 서일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한정의단에 들어가 군사 책임을 맡고, 이듬해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속 부대가 되었다. 이어 사관 연성소를 세워독립군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갖추는데 힘썼다. 이즈음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이 독립군을 싹쓸이하겠다며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싸워 크게 물리쳤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치르며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뒤이어 독립군 부대들이 모여 대한독립군단으로 꾸려지자, 김좌진은 부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러시아로 갔다가 곧 만주로 되돌아왔다. 김좌진은 군사 단체인 신민부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다, 옛 부하인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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