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안중근

윤의사 2009. 10. 25. 09:20

이제 내일(10월 26일)이면 안중근의사가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에서 사살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그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분명히 알렸다. 모진 고문과 거듭되는 재판에 시달리면서도 논리있게 답변하고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아 일본인들도 감탄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안중근은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에 나섰는데, 어김없이 쏘아 맞혀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세례명을 받고 서양 학문도 배웠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안중근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운영하던 석탄 가게를 팔아 삼흥 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 경영에 힘썼다.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과 싸우다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안중근은 더욱 거세진 일본의 침략 의도에 맞서 독립 운동의 방법을 바꾸었다. 그래서 러시아로 건너가 교포들을 찾아다니며 나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실력을 키우자고 연설하였다. 이어 안중근은 이범윤 등과 함께 대한의군을 만들고 참모중장을 맡았다. 안중근은 대한의군을 이끌고 도문강 연안에서 일본군을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경흥에서 5000명에 이르는 일본 경찰대와 3차례나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하다

1909년 봄에 안중근은 동지 11명과 함께 비밀 결사인 ‘단지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3년 안에 안중근, 엄인섭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김태훈이 이완용을 죽이기로 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맹세하였다. 그해 9월, 안중근은 이토오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기회라 여긴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암살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0월 26일, 안중근은 일본인 기자로 꾸미고 이토오 히로부미가 도착할 하얼빈역에 미리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토오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환영객들을 향해 나서는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쏘아 명중시켰다. 이어 태극기를 꺼내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바로 붙잡혔다. 안중근은 재판을 받으며, “이토오 히로부미는 대한의 주권을 빼앗은 원흉이며, 동양 평화를 어지럽히는 자이다. 이에 대한의군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니, 일반 살인범으로 다루지 말고 전쟁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항변하였다. 안중근의 논리있는 답변과 전혀 굽히지 않는 당당한 태도에 일본인들도 감탄했다고 한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안중근은 감옥에 있는 동안 ‘동양 평화론’을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한, 중, 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부조 길을 찾자고 하였다.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과 캐나다와 멕시코,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블록화를 추진하여 국가의 이익을 찾는 것을 보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시대를 앞선 선각자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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