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며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조국 광복 뒤에는 자주적인 남북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민족 지도자이다. 요즈음처럼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정말로 우리나라에 다시 나타나야할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릴 때 이름은 창암, 호는 백범이다.
김구의 아버지는 훈장을 모셔와 집에 서당을 세울 정도로 자식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벼슬을 사고파는 시절이라 김구는 과거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고, 썩어빠진 사회를 뜯어고치겠다며 동학에 들어갔다. 김수는 동학 세력이 주도하는 갑오 농민 전쟁에 참여했다가 쫓기는 몸이 되었고, 만주로 건너가 의병이 되어 일본에 맞서 싸웠다. 그러다 을미사변 소식을 듣고 귀국하던 길에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본군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 김구는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고종의 배려로 사형 집행은 면했다. 그리고 이듬해 탈출하여 마곡사의 승려로 지내며 한동안 숨어 지냈다. 그 뒤로 고향에 돌아와 교육 활동에 힘쓰다가 ‘안악 사건’으로 붙잡혀 1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이끌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경무 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지냈다. 1930년에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만들어 대표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김구는 무장 독립 운동을 펴기로 결심하고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일본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기 시작하였다. 이봉창은 실패하였으나, 윤봉길이 성공하여 일본 육군 대장 시라가와를 비롯한 중요 인물을 없앴다. 그 뒤로 임시 정부는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게 되었다.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총통 장개석을 만나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다지는 한편, 중국 군관 학교에서 광복군을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김구는 1940년에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이듬해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내진입작전을 펴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여 귀국하였다.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세우려 하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강대국들이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자,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나아가 남한과 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는 것도 반대하여, 남북한 통일 정부를 세우고자 남북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 협상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고, 결국 남한과 북한에 잇달아 정부가 세워졌다. 그 뒤로 남북으로 찢겨진 민족의 통일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다가,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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