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663

오늘은 한국광복군 창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광복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0년 9월 17일에 중화민국 충칭에서 임시정부 정규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1939년 1월에 만들어진 한국독립당 당군과 지청천과 이범석이 이끌고 온 만주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를 통해 만들어졌다. 광복군은 1944년까지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통제를 받다가 1944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했다. 광복군은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참모처장에 채원개, 군무처장에 유진동을 임명하면서 모병(募兵) 활동도 적극적으로 벌였으니, 5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해 산서성, 수원성, 절강성, 안휘성 등의 지역으..

오늘은 김대건 신부 순교

1846년 9월 16일, 한국 최초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가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어릴 때 이름은 김재복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아로 대건 안드레아로 쓴다. 김대건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증조할아버지가 1814년에 순교하였다.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외진 산골 마을로 숨어들었다. 훗날 그의 아버지 김제준도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이처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1822년 8월 21일 태어났으며,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려는 꿈을 키울 정도로 깊은 신앙심으로 기꺼이 시련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김대건은 1846년 5월 최양업과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찾아보다가 관리들에게 붙잡혔다. ..

오늘은 라면이 처음 출시

지금이야 가벼운 한 끼 식사로 라면을 먹지만, 1963년 삼양라면이 처음 선을 보일 때만 해도 국내는 아직까지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사실 본인이 1988년 학교에 처음 근무를 할 때도 도시락을 못가지고 오는 학생이 있어 자친(慈親)께 도시락 준비를 부탁해 특별실로 공부하러 갈 때 학생의 책상에 가져다 준 적이 있다. 먹고 나서는 책상 밑에 놔두면 하교 후에 가져간다고 메모도 남겼다. 1988년도 어려웠던 시절이니, 1960년대는 더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삼양식품을 창업한 전중윤 회장이 남대문 시장을 가다가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음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 회장은 일본을 갔을 때 먹었던 라면을 생각하며 라면이야말로..

오늘은 3선개헌안 변칙통과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윤보선 후보를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임기가 끝나는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3선 개헌이 필요했다. 같은 해 6월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자력 개헌이 가능한 2/3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공화당이 자력으로 개헌을 위한 의원을 확보하자 신민당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 및 여러 단체에서 개헌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정부는 대학과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며렸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내 3선 개헌을 반대하는 김종필 등을 제명하였다. 1969년 7월 박정희는 3선 개헌은 국민들의 뜻으로 결정하며, 국민투표에서 3선 개헌이 통과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해 대통령에서 물러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공화..

9월 13일 오늘의 역사, 후세 다쓰지 선생 서거

후세 다쓰지 선생은 1880년 11월 13일 일본 오사카군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제자백가 중의 하나인 묵자의 겸애설의 영향을 받아 약자를 돕는 일에 앞장선다. 특히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중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전과를 자랑하자 후세 다쓰지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고 한다. 후세 다쓰지는 러일전쟁을 반대한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자로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평등하듯이 국가 또한 평등하다고”생각했다고 한다.셋째 아들은 톨스토이의 한자 표기로 ‘모리오’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899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해 1902년 졸업해 바로 검사시험에 합격하고 임용이 되었다. 하지만 1년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이유는 남편과 첩의 학대에 자식 셋과 자살을 기도..

9월 12일 오늘의 역사, 단기를 국가 연호로 사용

단기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해인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기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9월 12일 단기를 국가의 연호로 처음 채택하였다.1948년 9월 12일 국회에서는 재적의원 133명 중 106명의 찬성을 얻어 의결, 확정된 ‘연호에 관한 법률’은 9월 25일 ‘법률 제4호’로 공포됐고, 여기에서 단군기원이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가 되었다. 단기에서 서기(서력기원:예수 크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함)를 연호로 사용한 것은 1961년 12월 2일에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부칙에서 “본 법은 `1962년 1월 1일부터 실시한다. 법률 제4호에 의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고 법제화가 되어 ..

9월 11일 오늘의 역사, 2001년 미국. 9·11테러 발생

2001년 9월 11일 오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여객항공기가 들어가 폭발하면서 무역센터 건물 2동이 붕괴되는 대참사가 발생하여, 미국은 물론 세계가 경악을 금치못했다. 테러범들은 오전 8시 45분 납치한 여객기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북쪽 건물의 93층과 99층 사이 처음 충돌하였다.9시3분 경에는 납치된 또 다른 여객기가 남쪽 동 77층과 85층 사이에 충돌하면서, 두 빌딩에서는 대형화재가 발생했다.1시간30분 후 두 건물은 강력한 폭발과 함께 붕괴됐다.여객기가 충돌한 지점보다 높은 층에 있던 사람들은 계단이 붕괴되어 대피가 어렵고 화재에 의한 열기와 연기 때문에 아찔한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했다.오전 9시 59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무너지고, 이어서 10시 28분 북쪽 건물이..

9월 6일 오늘의 역사, 대한민국에 여군이

1950년 9월 6일, 6·25 전쟁이 한창일 때 국방부 일반명령 제58호를 근거로 임시 수도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발족되면서 한국에서 여군이 정식으로 등장하였다.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본부를 둔 교육대는 제1기로 500여 명의 지원자를 받아 교육시키고 9월 28일 491명의 여군이 탄생되었다. 1951년 11월에 여자의용군교육대가 해체되고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여군과로 편입되었다가, 1953년 2월 1일에 육군보병학교에 여군교육대가 다시 창설되어 군사훈련과 병과기술훈련을 받았다. 1955년 7월에 여군훈련소가 설치되어 여군만의 훈련을 전담하였다.1967년 7월 14일에 육군간호학교가 만들어져 간호장교를 키웠으며, 1970년 12월 여군단으로 승격하였다.1974년 1월 여군계급제도가 개편돼 장교·부사관..

오늘은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러일전쟁 종결

포츠머스 조약은 1905년 9월 5일에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일본 제국의 전권 외상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간에 맺은 러일전쟁의 강화 조약이다. 이 조약은 일본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했음을 확인해 준 조약이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제1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일본이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대한제국에 강요할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만주침략을 위한 확실한 교두보를 확보하였습니다. 이 조약을 주선한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조약 체결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러일 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중국 뤼순..

9월 4일 오늘의 역사, 간도협약이 맺어진 날

간도(間島)는 섬 이름이 아니라, 두만강과 토문강(土門江)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간토라고도 한다. 길림성을 중심으로 요녕성을 포함한 장백산맥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의 북간도를 함께 가리키며, 우리가 흔히 간도라 하는 곳은 연변 조선족이 있는 북간도를 가리키고 있다. 넓이는 2만 1천㎢로 한반도 면적의 10분의 1 정도가 된다.간도라는 지명이 된 데에는 두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즉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지역이란 뜻에서 간도가 되었다는 것과 조선 시대 말기에 나라에서 많은 세금을 거두는 것에 지친 북부 지방의 농민들이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건너가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황무지를 개간한 조선 농민들이 이곳을 두만강 옆의 섬으로 본 데서 ‘옆섬’ 또는 ‘간도(間島)’라고 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