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5월18일 오늘의 역사, 5.18 민주화 운동

윤의사 2025. 5. 18. 15:33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으로 유신정권이 붕괴되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 후 전두환 신 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국회를 봉쇄했다. 이에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 대학생 10만이 모여,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등  대학가에서 민주화에 대한 시위가 확대되자 '전두환과 하나회'는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모든 정치활동을 규제하고 그날 자정을 기해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을 선포했다.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전남대학생 200여 명이 교문에서 전두환 신 군부가 내린 비상 계엄령의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며 시작되었다. 이에 사전에 시위진압훈련을 받은 11공수부대원들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운동권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살상하고 폭행했다. 이에 시민들은  곤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에 맞서 점차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고, 시위는 하교하던 고등학생까지 참여하며 확산되었다. 이에 부상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의 포악한 진압 실태를 알리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갔고 광주 시민들 또한 학생들의 시위에 가세하면서 5.18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튿날, 공수부대원 1,000여 명은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트럭 30여 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했다. 그리고 시위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는 유혈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5월 20일 밤 11시쯤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의 첫 발포를 시작으로 다음 날인 5월 21일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도청 앞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맞춰 시민을 향해 총을 쐈다. 5.18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된 5월 21일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해 무장했고, 계엄군은 같은 날 시내에서 철수하며 도시는 일시적으로 시민군의 통제 속에 놓였다.
광주의 진실은 중앙 언론을 철저히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왜곡됐고 정부는 이를 '폭도들의 반란'이라 주장했다. 5월 26일 중무장한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진입을 하려고 하자,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온몸으로 탱크를 막셌다며 '죽음의 행진'에 나섰으나 막지 못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기관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도청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 1시간 30분 만에  도청을 사수하던 윤상원 등 시민군이 사망하면서 광주는 계엄군의 지배로 철저히 통제된 채 10일간 지속된 항쟁은 막을 내렸다. 공식 사망자 수는 163명이지만 당시 실종자와 부상자,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 이후 1988년 제 6공화국은 이 민주화 운동으로 191명이 사망했고, 852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내에서 보도가 제대로 되지않아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시작으로 1994년 5월 5.18 민중항쟁연합은 광주학살책임자 35명을 서울지검에 고소해 법정투쟁을 시작했다. 1995년 12월 21일에는 '5·18 민중항쟁특별법'이 제정됐고, 1997년 4월 17일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 및 반란죄가 확정되었다. 법원은 이들에게 무기징역과 수천억원대 추징금을 선고하며 역사적 책임을 물었다.

1997년 5월 9일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정했으며, 2002년 1월 26일 광주민주화운동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