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3월 22일 오늘의 역사, 윤보선 4대 대통령 하야

윤의사 2025. 3. 22. 14:17

1897년에 태어난 윤보선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연소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영국으로 에든버러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해서 조선총독부의 중요감시대상이기에 친일을,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일제에서 독립하자 한국국민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고, 한국민주당으로 흡수되며 계속 활동하였다.

집안의 명성에 능숙한 영어, 그리고 일제 식민지 말기 실시된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은 윤보선에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려고 했다. 함께 활동한 송진우와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지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시장으로 문맹퇴치를 위해 초등학교를 증설하고 허례허식 등의 개선을 위한 신생활운동 등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상공부 장관 등을 역임하다가 이승만과의 의견 차이로 갈라섰다.

1954년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신익희와 조병옥의 죽음으로 야당의 지도자로 나섰다.

19604.19혁명 후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같은 해 812일 민의원과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이 되어 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국무총리가 된 장면이 내각을 이끌었으나 반목이 많아 혼란을 초래했다. 두 사람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고, 3.15부정선거 책임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에 소극적이었기에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대학생들의 통일 운동에는'선건설 후통일'정책을 내세우며 민간차원의 통일 논의를 반대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련했으나 민주당의 분열과 지도력 부재로 실행하지 못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때 박정희가 516일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윤보선과 박정희는 의견 대립을 빚다가 1962년 3월 22일 윤보선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군사 정부 연장 반대 운동을 벌였으며 1963년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윤보선은 1990년 세상을 뜰때까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