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장

윤의사 2024. 6. 22. 10:18

손원일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독립운동가 손정도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원광중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ㅣㄴ학하려고 상하이로 가려던 때에

아버지 손정도가

"바다에 미래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는 가르침대로 조국의 미래는 바다라고 생각하고 일제 치하에서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원일은 독일 상선 하벤 슈타인, 화객선 람세스, 중국 초상국 소유 여객 화물선에서 약 4년 6개월의 승선 생활을 하면서 항해술을 익히며 국제적인 안목을 넓히고 세계의 문물을 습득했다.
이때 부친 손정도가 일제의 고문과 과로로 49세로 순국했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많이 슬퍼했다고 전한다.

1934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자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원으로 왔다면서 일본 경찰이 붙잡았으나 곧 석방되어 다시 중국으로 가서 무역회사인 동화 양행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한 손원일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에 힘썼다.

가산을 털어 '해사대'라는 이름의 조직으로 80여 명의 젊은이를 모집해 어렵게 미 군정청의 허락을 받아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출범시켰다.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해방병단은 창단식을 가졌다. 이것이 한국 해군의 전신이며 모체가 되었다.

'해군은 신사가 되어야 한다'라는 믿음에서 손원일은 '선비 사(士)'자 두 개가  포개지는 때(十一월 十一일)를 창단일로

잡았다고 전한다.

​이어서 병사들을 이끌 장교를 육성하기 위한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설립해 전국에서 90명의 학생을 선발했다.

1948년에 정식으로 발족한 해군의 초대 참모총장이 되었으며, 여수·순천사건을 계기로 해병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1949년 4월 15일에는 380명 규모의 해병대를 창설했다.

손원일은 전투함을 구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를 지켜본 부인 홍은혜 여사를 비롯한 해군 장병들의 부인들까지 삵바느질과 빨래로 기금 모금에 동참했다. 해군 장병들은 봉급의 10%를 떼어 모금을 하여 1만 5,000달러를, 나라에서 4만 5,000달러의 예산을 지원받아 1949년 10월 17일 600톤급의  '백두산함(PC-701)'을 미국에서 구입했다.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서 북한군 600여 명을 태운 수송선을 격침하여 북한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6·25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다.

손원일은 통영상륙작전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으며, 1953년 6월 전역 이후 국방부 장관이 되어 동작동 국립현충원 및 국방대학교 건립 등 한국군 발전에 힘썼다.

그리고 1957년 6월 27일 초대 서독 대사를 지내며 눈부신 외교활동으로 한국의 국익과 외교에 힘을 보탰다.

평소 지병인 신장병으로 7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1980년 2월 15일 71세로 운명하여 국립 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에 안장되었으며, 태극 무공훈장, 자유 훈장, 미국 공로 훈장 등을 수상했다.

손원일은 한국 해군 창설의 중심인물로 현재 해군의 아버지로 불린다.(사진:해군본부)

손원일 제독

 

백두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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