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 4일 오늘의 역사, 1.4 후퇴

윤의사 2023. 1. 4. 19:30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950928일 서울을 탈환한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압록강에 이르자 중공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압록강변까지 이르자 102일 참전을 결정하고, 1019일 전쟁에 개입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24일 평양, 1224일 흥남에서 철수했고, 12월 말에는 삼십팔도선 이북을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남하하면서 195114일 서울을 함락하면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정하고 서울을 철수하였다. 1951318일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수복했으며, 이후 전쟁은 삼팔선 부근에서 국지전으로 전개되었다.

 

1·4 후퇴 이후 부산은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1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주택난으로 일본인들이 공동묘지로 조성한 아미동에 비석을 뽑아 계단과 집의 벽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피난민들은 귀신보다도 배고픔과 집 없는 것이 더 무서웠다고 전했다.

피난민들은 이전부터 많이 알려진 도개교인 영도다리에서 가족끼리 만자자고 약속해 영도다리도 늘 붐볐다고 한다.

피난민 중에는 이중섭과 같은 예술인들도 많이 와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1950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이루어진 흥남철수는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193척의 배를 타고

철수한 것으로, 가수 현인이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가요로 널리 알려졌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 때문에 피난민 수송에 난색을 표했지만,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통역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60만 톤의 장비를 버리고 남는 공간에 피난민을 태웠다.

 

1·4 후퇴로 끝날 뻔했던 했던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임시수도로, 피난민들의 성지가 된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로

자리잡으며 노동집약적인 신발산업의 성지가 되었다. 또한 각지의 피난민들이 왔기에 다양한 음식문화가 만들어져

관광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나는 김일성 일가와 중공군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16세인 삼촌이 1.4후퇴 할 때 북한의 기관총 난사로 운명을 달리했고,

아버지는 그것을 평생 한으로 안고 사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김일성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정말 북한이 어떤 세상인지 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내재적 역사관을 들먹이면서 북한 김일성을 평가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

얼마나 싫으면 사진처럼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오려고 했을까를 생각하길 바란다.

1.4 후퇴 당시 흥남부두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