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김종수의 역사이야기

어떤 죽음, 어떤 인생

윤의사 2017. 11. 26. 10:43

 얼마전 공무 차 방한한 일본 오키나와 공무원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담소를 하다가 문득 한 인물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일본인 들이 왜 그 인물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궁금했다.

그는 바로 범옹 <신숙주> 였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사육신과 대척점에 있는 변절자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신숙주를 말할 때는 사육신의 대표 성삼문이 같이 나온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란의 3등 공신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할 때 상서사에 보관되어 있던 옥새를 가져다 준 인물이 성삼문이었다. 당시 그는 동부승지(옥새담당비서)였다. 여하튼 성삼문은 그 공으로 공신이 되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은 속으로 수양대군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성삼문이 공신 작위를 사양하는 글이 여러 번 나온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세조 2년에 상왕 복위운동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역적으로 처단된다. 국문을 당할 때 당당했던 그의 태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국문장에 신숙주도 있었는데, 성삼문은 신숙주의 배신을 힐난했다.
배신이란 일찍이 세종께서 어린 세손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는데 신숙주가 이를 지키지 않고 단종(세손)을 내몬 수양대군의 찬탈에 동조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성삼문은 능지처사 되었다. 능지처사는 형벌 중 가장 중한 처형으로, 사람을 형틀이나 나무에 묶고 칼로 생선을 회 뜨듯이 발가락부터 심장까지 하나 하나 조각내어 죽이는 방식이다. 단순히 몸을 토막 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칼로 피부를 뼈와 함께 도려내는 것이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힘들다.
사지를 몸통과 분리시키고 피를 흘려 숨이 끊어지면 목을 자른다. 그 목은 효수라 하며 성문 밖에 내장과 함께 장대에 걸어놓아 경계로 삼는다. 성삼문의 도려낸 살쩜은 전국 8도의 도백에게 분배되었다.

성삼문의 부친 성승도 아들과 같은 능지처사를 받았고 성삼문의 위 항렬 즉 성승의 형제, 성삼문의 형제, 성삼문의 아들 모두 삼족은 교형(목을 조여 죽이는 질식사)에 처해졌으며 처와 딸은 공신들의 노비가 되었다.

이처럼 성삼문은 극악하고 잔인한 형벌을 받고 가문은 멸문지화되었다. 성삼문의 살이 타는 고문현장에 절친신숙주가 있었다. 신숙주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친구여 미안하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나는 살아서 세종대왕의 찬란한 업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노력할 걸세"라고 했을까. 아니면
"삼문 이 친구야. 나는 당신과 인생관이 다르네. 충군이 꼭 의리를 지켜 죽는 것만이 다가 아니네. 살아서 문물을 이어가고 나라와 백성을 안락하게 한다면 그게 충군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을까.

그 후 신숙주의 영달은 눈부셨다.
영의정 두번에 네번(정난, 익대, 좌익, 좌리공신)이나 공신이 되었다. 이는 조선에서 전무후무한 출세였다.

신숙주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훈민정음 후속조치와 세종이 이룩한 문물을 정비하고 계승해 나갔다.
그는 정치가이고 뛰어난 외교관이었으며, 또한 학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여진족을 직접 정벌하고 북변에 축성을 하는 등 북쪽 방어를 튼튼히 하였으며 남쪽의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신숙주는 일본과의 관계(교린)를 중요시하여 수차례 일본과 대마도를 사신으로 다녀왔다.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주와 협상하여 조일무역협정이라 할 수 있는 계해약조(조약)을 체결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계해약조는 중종 때 삼포왜란이 발생할 때까지 80년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규정한 기본조약이다.

59세 되던 해 신숙주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성종은 친히 신숙주의 집으로 가서 유명을 물었다. 신숙주가 성종에게 남긴 유언이 실록의 신숙주 졸기에 남아 전한다.

"전하, 일본과의 관계를 잃지 마소서"

죽으면서도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조정에서 대국 명나라와의 사대에 온통 몰두하고 있을 때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저술한 일본 견문록 <해동제국기>는 조선의 고위관료가 남긴 최초의 대 일본 지식정보서였다.

오키나와 공무원들은 <해동제국기> 에 씌여져 있는 오키나와 이야기를 암송하고 있었다. 그들이 신숙주에 대해 내게 물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블로거의 견해 : 일본과 대립이 아닌 상생의 관계를 맺어야만 한반도에 긴장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    가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속을 감추는 일본인과 중국인의 마음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일찍 속을 내보여 손해보는 경우가 많다.


신숙주 초상


해동제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