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김종수의 역사이야기

자금성

윤의사 2017. 11. 16. 16:20

오늘부터 국립무형유산원 김종수과장이 쓰는 역사이야기를 올리려고 한다.

김종수과장은 4년간 사학과에서 함께 수학한 대학 친구이다.


19세기까지 중국은 오늘날 미국을 능가하는 최강국가였다. 정치적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사대의 관계를 형성했으며, 문화적으로는 거대한 중화세계를 구축했다.
오늘날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통용되듯이 전통시대 한자는 거대한 중화문화권 오이코메네(공동체의 뜻)를 형성했다.

중국의 통치자는 이념적으로 천자(하늘의 후손)였고 정치적으로는 황제였다. 황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이후 공식 직함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이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외교적으로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역대 왕조 그 어느 중국 황제도 우리나라를 직접 방문한 적이 없다. 물론 우리나라 왕들도 중국을 방문한 사례는 없다.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에 충렬왕, 충선왕이 중국으로 끌려간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황제가 작은 제후국가를 방문하는 것은 황제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대신 황제는 칙사라는 대리인을 파견했다. 칙사는 주로 태감(내시)들이 담당했다. 사신으로 오는 태감들은 이번 트럼프처럼 한아름 선물을 챙겨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내시는 본래 성적 욕구가 없는 대신 재물 욕심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천자의 나라 중국 황제가 사는 곳이 자금성(紫禁城)’이다. 자금성을 영어로는 "forbidden city"라고 하니, 문자대로 해석하면 '금지된 도시' 라는 뜻이다.
북쪽 하늘에 빛나는 별 중에 자미원이 있었으니 그곳에 천제가 거주하며 그 별이 우주의 중심이라 여겼다. 중국 황제는 천제의 아들 즉 천자이니 그 자미원은 황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란 금할 자로,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신성한 곳이다. "" 자는 저어하고 삼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이처럼 자금성은 천자가 머무르는 별처럼 높고 신성한 곳이란 뜻이다. 그런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트럼프를 위해 자금성을 통째로 비워 예우했다고 한다. 황제 대우를 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특정인을 위해 경복궁을 통째로 비울 수 없지만 사회주의인 중국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자금성을 건설한 이는 명의 성조 영락제 주체이다. 난징에서 명을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를 북쪽의 연경 즉 지금의 베이징 근처 방어를 맡겼다. 황태손 주윤문을 제외한 다른 자식들은 제국을 지키고
방어하는 변병으로 삼은 것이다. 주원장의 후계자는 손자 건문제였다. 장남이 일찍 사망하여 손자를 후계자로 삼고 대신 장성한 황자들은 사방에서 황제를 위한 변병 역할을 하도록 했다. 특히 가장 용맹하고 기지가 뛰어난 넷째 연왕 주체를 북쪽에 배치한 것은 비록 중원의 원나라는 멸망시켰지만 몽골족이 북쪽 막북에 건재했기에 그에게 방어를 맡긴 것이다.

훗일 연왕 주체는 군사를 이끌고 난징을 점령해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다. 명의 세 번째 황제 영락제이다. 영락제는 자신이 있었던 연경, 즉 베이핑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북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베이징이라 했으며 지금의 자금성을 건설했다.

자금성은 1644년 청의 만주족이 입성하여 청나라 궁궐이 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공식 등재 명칭은 "명청 시대 궁궐(forbbiden city)"이다.

자금성에는 나무가 없다. 뜨거운 태양이 자금성 바닥 돌길을 내리쬐면 그야말로 화로처럼 뜨겁다. 자금성엔 왜 나무를 심지 않았을까. 혹자는 자객의 침입으로 부터 황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거대하고 광활한 구중궁궐에 갇혀 지낸 황제의 삶이 꼭 행복하진 않았으리라. 황제의 삶은 환관과 궁녀에 둘러싸인 피폐한 삶이었다. 실제 명나라 황제 중에는 궁녀에 의해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환관의 꼭두각시가 된 허수아비 황제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관이 자금성의 남문 오문에서 황제가 있는 태화전까지 가려면 아침부터 반나절이 걸렸고 또대기하다 차례가 되어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면 저녁 때가 다 되었다. 늙은 대신들은 다리가 후들후들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사람의 심리는 공간과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황제를 만나는 것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어려워야 그만큼 황제를 지엄하고 신성한 존재로 여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중국 통치자 중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한 사람은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초청으로 방한한 장쩌민 국가주석이다. 그 후로 후진타오, 시진핑이 방한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국외를 다닐 수 있으니 옛날 황제보다 더 행운인 지도 모른다.


자금성을 만든 영락제





자금성의 전체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