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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아랍인과의 인연

윤의사 2015. 11. 15. 17:11

유럽인들과 아랍인들의 오랜 반목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13일의 금요일에 벌어진 파리에서의 테러는 세계인들을 경악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아랍인들의 이상향이었다.

우리는 고려시대의 무역항으로 벽란도를 들고 있다. 이 항구를 통하여 우리나라가 이곳을 드나들던 아라비아인에 의해 코리아(KOREA)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에도 울산항을 통해 아라비아인이 무역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울산항을 통해 아라비아와의 무역이 활발했으며, 신라의 대표적 향가인 <처용가(處容歌)>의 주인공 처용도 아라비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0세기 초에 아라비아 지역에서 출간된 여러 이슬람 책에 따르면 아라비아 사람들이 신라를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해안의 맞은편에 위치한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만이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곳에 아라비아 사람들이 정착하여 자신의 조국으로 삼고 살았다. 유목 생활을 하는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신라 땅은 신선한 공기,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상업과 농업의 발달, 빛나는 보석들이 풍부하여 신라 땅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였으며, 다시 아라비아 땅으로 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1987년 경주시 황성동 고분에서 많이 출토된 토용(土俑)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신라로 이주해 왔음을 알게 해주는 자료이다. 흙으로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빚은 토용이라고 하는데, 황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에 위치한 신라 37대왕으로 추정하는 괘릉에 서있는 석인(石人)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모습이 아닌 아라비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석인이 있다. 석인은 아라비아 사람의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을 하고 있다.

경주에 있는 많은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물 중에는 서역 문화의 유품들이 발견되어 울산항을 통하여 많은 아라비아인들이 들어왔음을 알게 해준다. 즉 경주 부근의 신라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관옥(管玉)과 곡옥(曲玉) 및 가지 모양을 한 구슬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품과 함께 유리 제품인 팔찌, 병, 술잔 등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중 도마형 유리 기구는 아라비아 상인을 통하여 흑해와 남러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향가인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이 880년쯤 바닷길을 통해 신라에 도착한 아라비아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턱수염이나 깊은 코 등이 보이는 처용의 가면은 중동 출신의 아라비아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아라비아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활발하게 오고 갔다. 고려 현종 15년(1024)에는 아랍계 상인들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더 나아가 1274년 충렬왕의 왕비 장목왕후를 보좌한 아라비아인 시종이 고려에 귀화하여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름을 받고 고려 여인과 혼인했는데, 오늘날 덕수 장씨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왕조실록>에 아라비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아라비아인을 회회인(回回人)으로 불렀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봉급과 집을 선사받아 생활하면서 수정 채집 등 특수한 일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아라비아인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땅에 자주 왕래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국가이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아랍인들까지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는 정신으로 산다면 서로를 불신하면서 생기는 불행은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

 

괘릉에 세워진 무인석, 생김새가 아랍인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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