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영남길

김대건 신부 生居地, 은이성지

윤의사 2015. 2. 23. 18:28

김대건은 조선 유교 사회의 보수 세력에 의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를 널리 알리는 데 온 몸을 바쳤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책임을 다한 참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어둠의 장막을 뚫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간 개척자였다. 김대건의 어릴 때 이름은 재복,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김대건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증조할아버지가 1814년에 순교하였다.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용인 양지면 은이성지로 숨어들었다. 훗날 그의 아버지도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이처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려는 꿈을 키웠고, 깊은 신앙심으로 기꺼이 시련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순조 때 조선 교구가 만들어지고 신도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조선인 신부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간절해지자, 김대건은 프랑스 신부 모방의 추천으로 신학생으로 뽑혔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뒤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마카오에 있는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갔다.

김대건은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웠다. 그 뒤 10년 만에 국내로 돌아와 두 차례의 박해로 기울어진 천주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완당 신학교 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신부가 되었다.

 

1845년 8월에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서울로 돌아와 천주교를 널리 퍼드리는 데 앞장섰다. 이때 신학생들을 뽑아 비밀리에 교육시키는 일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몰락한 양반을 비롯한 많은 농민, 노비, 여성들이 천주교에 믿음을 갖게 되었다.

김대건은 이듬 해 5월 최양업과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찾아보다가 관리들에게 붙잡혔다. 그 뒤 서울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다가, 나라의 법을 어기고 마카오에 가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감옥에 있는 동안 김대건은 세계 지도를 그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알려 주고,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관리들을 간곡히 설득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자질이 너무 아까워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면 관리를 시키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김대건은 흔들리지 않았고 유서를 남긴 뒤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영남길 6코스이다.

 

 

 

김대건 신부의 생거지인 은이성지 표지석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가 이곳 은이성지에서 세례를 받은 곳이다. 이곳에 은이성당이 세워져 있다.

신덕고개에 세워진 김대건 신도비
법륜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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