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황석마을에 있는 정배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유형원의 묘는 사망 직후에 만들어졌다가 1971년에 묘역을 다듬으면서 41M의 곡장을 만들었다.
봉분 앞으로 경계석이 정돈되어 있으며, 경계석의 중앙 부분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봉분의 오른쪽에 176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다. 비의 총높이는 160㎝, 비신 높이 136㎝, 폭 59㎝, 두께 23㎝이다.
봉분의 양쪽에는 금관조복을 착용하고 있는 문인석이 있으며, 신체의 사이즈가 맞지 않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모순을 주장하는 유형원처럼 문인석의 얼굴도 웃음을 주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 효종 때의 실학자이다. 그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해 실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유형원은 서른 살이 넘어서 진사 시험에 급제하기도 하였으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대신 농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전라북도 부안에 내려가, 힘든 농촌 생활을 체험하면서 20여 년에 걸쳐 <반계수록> 전 26권을 완성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 주자는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하고, 과거 시험 제도를 없애고, 세금을 가볍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반계수록>은 조선의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분야에 걸쳐 체계적으로 개혁안을 정리하였으나, 그가 벼슬을 하지 않아 정책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유형원은 이수광에 의해 시작된 실학을 학문으로 체계화하여, 뒷날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 전성기를 이루도록 하였고, 영조는 <반계수록> 전체를 간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의 개혁은 ‘향약’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봉건적인 양반제도를 인정하고 유지하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영남길 8코스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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