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역사뉴스

3.1절을 맞아 해결해야 할 것은?

윤의사 2012. 3. 1. 12:12

3.1운동이 일어난 지 93년이 지났다.

오늘 이명박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였다.

일본은 80세가 넘으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하루빨리 풀어드려야 한다.

 

일본의 침략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자행된 정신대였다.

전쟁이 나면 남자는 전쟁터에서 희생이 되고, 여자들은 성을 위협받았다.

일본의 침략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한 한국에 대한 약탈은 물적 약탈뿐만 아니라 인적 수탈로 이어졌다.

즉 징병제, 징용제, 여자 정신대가 인적 수탈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준 것은 여자 정신대이다.

 

원래 일본은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군위안부라고 하였다.

이것은 중일전쟁 때에 점령 지역에서 일본군의 만행이 저질러지자,

반일 감정을 염려한 점령 지역 사령관의 요구에 의해 정신대의 전신인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여기에 있는 여성의 80%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이 위안소는 일본 군인의 요구에 응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군인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한국인 여자는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기생을 비롯한 술집 여인을 주로 보냈으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일반 가정의 처녀들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각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병력 소모가 많아지고 이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1943년 7월에 여자 학도병의 동원을 결정함과 동시에 여자 정신대를 조직하였으며,

더욱이 여자 정신대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1944년에 ‘여자 정신 근로령’을 공포,

징병제와 같은 강제 동원을 법으로 정해 전쟁터에 부녀자를 대량 투입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들 일본인은 초등학생까지 뽑아갔는데,

꾐에 빠져 학생들은 전쟁터에 가게 되었다.

그 꾐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교복의 단추가 5개였는데,

전쟁터에 나가면 일본 왕이 7개의 단추를 달아준다는 것이다.

순수한 우리나라의 어린 학생들은 일본인의 달콤한 말에 속아

결국 전쟁터에서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

 

나눔의 집에 있는 역사관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은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