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용인 주북리 고인돌

윤의사 2010. 11. 23. 21:16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825번지에 있는 주북리 탁자식 교인돌은 찾기가 쉽지 않답니다. 양지면에서 이룸연수원 고개를 넘어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곤지암 방향이 아닌 용인 방향으로 가면 ‘주북리 고인돌’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주북리 탁자식 고인돌은 김해 허씨 묘역 안에 있어 주인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길이 2.8미터, 너비 2.5미터, 두께 0.45미터의 크기입니다.


고인돌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거석(巨石) 문화물이다. 돌멘(Dollmen) 또는 탱석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말로서 돌(doll)은 상(床)이나 테이블 같은 것을 의미하며 멘(men)은 암석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고인돌은 주로 한국, 만주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부족장의 무덤으로, 그 주된 분포 지대는 화순․고창․강화 등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현재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그 축조 형식에 따라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구분된다.

남방식은 돌관이나 옹관을 매장하고 그 위에 5~6개의 돌로 개석(蓋石:덮개돌)을 고여 놓은 것인데, 이 남방식의 특징은 석실이 지하에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실에 시체를 묻고 간석기 또는 토기와 같은 부장품을 묻었다.

북방식은 장방형의 판석(板石) 4~5개를 지상에 세워서 석실을 만들고 나서 그 위에 대형 판석을 덮개돌로 덮은 것이다.

그런데 덮개돌은 길이가 3~5미터이고, 폭이 2~4미터 내외인 무거운 돌로서, 그 무게가 무려 50톤이나 된다. 이 정도 무게가 나가는 돌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옮겼을까?’하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방법으로, 첫째로 많은 사람을 동원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잇다. 한 사람이 100킬로그램을 소화해 낸다고 해도 무려 5백 명의 장정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고인돌 제작에도 5백 명 가량의 장정이 동원되었다. 그 옛날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주인은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부왕의 지위를 물려받은 후계자는 고인돌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이 강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의 충성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는 좀더 쉽게 덮개돌을 옮기기 위하여 겨울철에 얼음이 얼거나 눈이 와 미끄러울 때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땅이 얼어 미끄러우면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덮개돌을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사람은 겨울에만 죽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 이 기간에는 가매장(假埋葬)을 해 놓았다가 추운 겨울이 오면 정식으로 매장했을 것이다.

셋째는 통나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덮개돌 밑에 통나무를 끼워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 방법은 계절에 관계없이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덮개돌을 바칠 기둥돌의 높이에 맞게 경사가 지게 흙을 쌓아 놓으면 쉽게 고인돌의 덮개돌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주로 돌이 구릉이나 야산에 있으므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이 구릉이나 야산에 많은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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