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이한응 열사

윤의사 2010. 11. 9. 09:14

이한응 열사의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70-1 굴암고개 남서쪽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향토유적 제49호인 이한응 열사 묘는 곡장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묘비가 있다. 묘비 앞면에는 ‘국은 이한응 열사묘’라고 되어 있으며, 나머지 세 면에는 이한응 열사의 일대기가 쓰여 있다.

묘 앞에는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이 있다. 상석 앞면에는 전서체로 ‘국은 이한응열사묘’라고 쓰여 있다. 묘의 양 옆에는 망주석 한 쌍이 있다. 묘에서는 송전이 한 눈에 덕성리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한응 열사가 후손들이 얼마나 나라를 위해 애쓰는가를 지켜보는 것 같다.


이한응은 고종 때 정치가이며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외교관이다.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다.

이한응은 고종 11년(1874) 9월 11일에 용인에서 태어났다. 나라가 열강의 간섭 속에 어려움을 겪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하여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졸업한 뒤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에 합격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경호가 남영우영관의 영장(領將)으로 동학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이한응은 3년상을 치루느라 고향에서 칩거하였다. 24세에는 한성부주사에, 26세에는 모교인 영어학교 교사가 되어 후배들에게 애국 정신을 고취시켰다. 이한응의 재능이 인정한 정부는 1901년 3월에 영국·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임명하였다. 주영공사 민영돈을 도와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이한응은 민영돈이 귀국하자 대리공사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뒤이어 제1차 한일 협약을 맺어 일본의 꼭두각시인 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본의 만행은 계속되어 청·미국·영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한응은 일본의 침략으로 조국의 주권이 하나씩 잃자 런던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를 만나  한·일 관계와 한국이 독립국가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영일동맹과 카쓰라․테프트 밀약에 의하여 영국과 미국은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한응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다. 결국 이한응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대한 항의와 백성과 정부에 일본과 끝까지 투쟁하도록 경종을 울리기 위해 조국과 형과 부인에게 유서를 남기고 190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자결하였다. 그의 유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있다.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이 1905년 9월 5일 이한응의 시신이 국내로 돌아와 용인에 모셔졌다. 고종은 이한응에게 내부협판을 추증되고 장충단에 배향되었으며,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한응의 자결 소식은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민족 언론 기관에서 일제히 보도되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을 일으키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이한응의 자결순국은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를 항의하는 자결이 민영환·조병세로 이어졌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운융성의 해이기도 하다. 단기 4343년은 우리나라에게 행운이 보이는 괘이기도 하다. 정말로 세계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되새겨 순국하신 영령들이 기뻐하시도록 힘을 모아야만 하겠다.

 

이한응 열사 묘

 

이한응 열사 묘비

 

이한응 열사 묘에서 바라본 덕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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