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379 에 위치한 양지향교는 용인시 문화재 제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지 구사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곧바로 만나는 삼거리에서 또 다시 좌회전하여 직진하면 양지향교가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용인 시내보다 양지가 더 번성하였다. 양지현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지역 양반들을 위한 교육 기관인 양지 향교가 세워진 것이다.
양지 향교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처음 지었으나, 화재 등으로 소실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되었다.
양지향교의 구조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앞쪽에 양반 자제들을 가르칠 수 있는 명륜당이, 그 뒤쪽 내삼문 안쪽으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제사지내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양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던 것을 1971년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복원하였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자제를 가르쳤으나, 오늘날에는 교육보다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제사지내는 기능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최말단 행정기관인 현에 설치된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향교는 오늘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하듯이, 옛날에는 서당을 졸업하면 지방 학생은 향교(鄕校)로, 서울의 학생은 사부학당(四部學堂)으로 진학했다.
향교는 지방에 설립된 관학 교육 기관이다. 고려 인종 5년(1127) 3월에 ‘제주(諸州)는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향교가 설립되기 시작한 듯하다.
향교에는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문묘는 공자 등 선현을 모시는 제사 기능을 가졌으며, 명륜당은 학생들이 유학(儒學)을 배우고 연구하던 곳이다.
이러한 기능은 조선시대 향교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학생의 수는 부․목에 90명, 도호부(都護部)에 70명, 군에 50명, 현에 30명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 각 1명과 교예(校隸)가 있었다. 향교의 입학 자격은 양반의 자제 또는 향리로서 16세 이상을 원칙으로 하나, 16세 이하가 입학하기도 하였다.
교육과정(교과서)은 <소학>, 사서, 오경(시경․서셩․역경․예기․춘추)이 주였고, <근사록> 등이 추가되기도 했다.
향교의 모든 교육 활동을 평가하는 책임은 수령과 관찰사가 맡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학생들의 성적 평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령은 학생의 일과와 학습 결과를 매월 말에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시험을 치르게 하여 학생을 평가함과 동시에 교사의 근무도 평가했다.
향교의 운영 경비는 국왕이 하사한 학전(學田)과 이 밖에 지방의 유지로부터 희사받은 기부금으로 사들인 땅과 어장, 산림 등의 수세(收稅)로써 충당했다. 이에 따라 향교의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향교는 서원이 생겨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뒤 향교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선현을 모시는 문묘로서의 기능만 가지게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편 서울에 설립된 사부학당은 고려시대의 오부학당이 발전된 것이다. <고려사>에 ‘원종 2년 3월에 동서학당을 세워 별감을 두어 학문을 가르치며 지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화도에 설립된 것이고, 개경에는 원종 13년(1272)에 세워졌다. 이후, 고려 말기 공양왕 3년(1391)에 정몽주(鄭夢周)의 건의로 동․서․남․북․중의 오부학당이 세워졌다고 <고려사>에 전해진다.
학당은 향교와 달리 문묘로서의 기능은 없었고, 학생을 교육하는 기능만 있었다. 고려시대의 오부학당이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비로소 세종 때에 사부학당이 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부학당은 다른 말로 사학(四學)이라고도 했다.
교육 내용은 향교와 동일하고, 직원으로는 교수 2명과 훈도 2명이 있었으며, 주로 성균관 직원이 겸임하였다. 학생 정원은 100명이며 입학 자격은 10세 이상의 양반과 서민의 남자 아이로 제한되었다. 수업료는 향교와 마찬가지로 무료였으므로 나라에서 교육비 조달을 위해 학전을 지급했다. 학생들은 5일 마다 시험을 치렀으며, 매월 시험도 치렀다. 일 년 동안의 성적이 왕에게까지 보고되었다고 한다.
이들 학당은 입학하는 학생의 수가 정원보다 적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교육 활동은 다소 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학당 건물을 다시 지었으나 학생 수가 줄어듦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
향교나 사부학당의 학생 중 우수한 학생에게는 생원 및 진사과의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양지향교 전경
명륜당
수령 150년 된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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