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19년(1232) 몽골의 태종 오고타이는 대장군 살리타(撒禮塔,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를 총대장으로 2차 침입을 하였다. 이미 7월에 최우를 비롯한 지배층들은 강화도로 서울을 천도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몽골은 개경을 거쳐 한양을 함락시키고, 여세를 몰아 경기도 광주를 공격하였으나 고려의 완강한 저지로 실패하고 방향을 용인으로 돌렸다.
용인으로 몽골군이 온다는 소식에 고을 수령은 청야전술로 맞서고 백성들은 처인성으로 피난시켰다. 살리타이는 군사를 두 편으로 나누어 일부는 강화도로, 일부는 처인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처인성에는 각 고을에서 피난 온 군사와 백성 1,000여명과 스님 김윤후가 이끄는 승병 100여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살리타이는 처인성을 공격하기 전에 성의 정세를 알기 위하여 친히 대여섯 명의 정찰병만을 거느리고 처인성 동문으로 향하였다.
동문을 지키던 김윤후는 승병과 군사 수십 명을 매복시켰다가 살리타이 일행이 동문 앞을 지나자 기습 공격하여 모두 사살하였다. 살리타이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에 몽골군이 일제히 처인성을 공격하나, 장수를 잃은 몽골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져 우왕좌왕하는 틈에 고려 군사들의 공격은 계속되어 결국 물러나게 되었다.
살리타이의 죽음과 처인성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몽골은 고려와 강화하고 철군하였다.
나라에서는 살리타이를 사살하고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에게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사양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저는 전쟁을 당하여서도 무기를 잡고 일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처인성이 위치한 처인은 원래 부곡(部曲)이었다. 신분상은 양민이었으나 천민의 대우를 받으며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다. 나라에서는 처인부곡을 처인현(縣)으로 승격시켰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있었다. 충주성의 방호별감인 김윤후는 70일간 몽골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항쟁이 길어지자 지배층들은 항복하자고 김윤후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윤후는 노비 문서를 불태우면서 노비들을 격려하여 몽골군에 맞섰다. 노비 문서가 불태워지자 노비들은 앞을 다투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몽골군에 맞서니 몽골군은 충주성 점령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고, 김윤후는 상장군이 되고, 노비들은 해방되었다.
대개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이므로 스님들을 우대하여 국사나 왕사, 대사로 추앙하였다. 하지만 <고려사>에 그냥 김윤후를 ‘스님’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지위가 높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스님을 경애하는 고려 백성들이었기에 김윤후를 믿고 따라 몽골군을 두 번에 걸쳐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처인성은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다. ‘처인성승첩기념비’가 없다면 아마 야트막한 뒷산으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세계를 지배한 몽골군을 격파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몽골이 고려의 지배층이 있는 강화와 함께 처인성을 공격한 것은 바로 개경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경부고속국도가 지나지 않는가? 몽골은 이곳을 차지하여 서해 항로와 함께 보급로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교통의 요지였기에 처인성은 백제 때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군창(軍倉)으로 쓰일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1.2킬로미터 정도의 성이 남아 있었으나, 성으로서의 기능은 이미 잃어버린 채 군창으로만 쓰였다고 한다. 흙을 다져 쌓은 토성으로 현재 남아있는 길이는 425미터이다. 북벽 왼쪽에 출입구가 있으며, 남쪽 중간 자리에도 출입문 자리가 남아 있다. 1977년 10월 13일에 용인시기념물 44호로 지정되었다.
처인성 전경
처인성승첩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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