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유적지를 둘러보면 대개 유명 인사의 묘지가 많다. 아마도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의 영향인 듯 하다.
조광조가 중종과 훈구파의 탄압으로 일어난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하였다. 사약을 받고 죽기 전에 그는 시를 지었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조광조의 묘는 광교산 남쪽 지류를 타고 내려와 상현리에 머무는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양팽손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모신 것이다.
5개의 봉분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봉분이 조광조와 그의 부인 이씨를 합장한 묘이다. 묘 앞에는 두 개의 석인과 한 개의 망주석이 묘를 보호하고 있다.
37년의 짦은 생애 속에서 개혁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조광조를 상징하듯이 묘 근처에 등이 굽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 왕도 정치에 의한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꿈꾸었으나, 너무 급진적인 개혁을 한 탓에 거센 반발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훗날 그의 사상은 이황, 이이를 비롯한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광조의 자는 효직, 호는 정암, 시호는 문정이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너무 급진적이었고, 조광조를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역시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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