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의 묘소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문현산의 자락밑에 우뚝 서 있는 옛집 한 채가 있다. 바로 우리 나라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성의 상징인 포은 정몽주를 제사하는 충렬서원이다.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이곳에 이전하게 되면서 후손들이 모현면에 대대로 살게 되었는데, 중종때 조광조 등의 선비들에 의해 성균관의 문묘에 올려진 뒤에 존경의 열기가 크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명종 10년(1555년)에 포은의 고향인 영천에 임고서원이, 선조 3년(1570년)에 포은이 죽음을 당한 개성에 숭양서원이 세워졌다. 이어서 선조 9년(1576년)에 이계를 비롯한 지방 유학자들의 뜻으로 묘소가 있는 이곳에 서원이 세워진 것이다. 원래 조광조와 함께 모셔지다가, 효종 원년(1650년)에 조광조를 모시는 심곡서원이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에 세워지면서 포은 정몽주만을 제사하게 되었다.
충렬서원은 광해왕때 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려주는 사액서원이 되어 교육과 사회적 교화 기능을 수행하였다. 다른 서원들이 선현들의 제사에 치중하는데 비하여 충렬서원은 학문 활동에 열중하여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되지를 못했다. 이때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된 학자들은 1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없앴는데, 오직 개성의 숭양서원만 그대로 유지되었고, 충렬서원을 비롯한 포은 정몽주를 모신 서원은 없어지고 말았다.
43번 국도에서 충렬서원으로 들어가는 곳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바로 하라는 뜻일게다. 아마도 포은 정몽주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았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논밭을 양쪽으로 하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홍살문이 나온다. 서원의 입구에 홍살문을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매우 단순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외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 사당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당은 1956년에 다시 지은 11평 남짓한 8칸 짜리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그 옛날 한강 이남 지역의 학문의 중심으로써 많은 학자가 배출된 곳으로 위엄도 자랑할 만도 하지만, 지금은 전성기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현재도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모임 및 강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 윗쪽에는 1911년에 유림에서 다시 지은 사우가 있다. 이곳에는 포은의 위패와 정보, 이시직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서원에는 포은의 영정, 숙종이 친히 쓴 현판, 포은의 친필 서간문, 단심가 판목, 송시열의 서간문 등이 유물로 보관되어 있다. 특히 영정 의복을 갖추고 앉아있는 포은 정몽주를 그린 화상으로 고려 말기의 의복인 오사모를 쓰고 청포단령을 입은 모습이다. 양손을 소매 속에서 맞잡은 위로 금박의 허리띠가 있다.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공신으로 추증되어 만들어진 공신도상을 바탕으로 효종때에 충렬서원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충렬서원은 다른 서원처럼 기숙사인 재실, 도서관인 장경각 등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제는 교육적 기능이 아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충렬서원도 포은 정몽주의 운명처럼 꺼져가는 고려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보람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교육적 기능을 하기보다는 제사 기능의 비중이 커져 오늘날의 쓸쓸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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