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아산 장영실 유허를 찾아

윤의사 2010. 4. 25. 19:05

이 글은 수원 화성 박물관 상대영학예사의 글입니다.

 

장영실묘 

 

 장영실묘 문인석

 

장영실 추모비 

 

 

서울에서 장영실의 묘가 있는 아산으로 가자면 2001년 12월에 완공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좋다. 서해안고속도로는 전라도, 충청도와 수도권을 연결하는 소통로이자 새로운 교역 중심국으로 떠오른 중국과의 소통로이기도 하다.

4월에 들어서인지 날씨도 제법 따뜻해지고 도로 주변의 들판은 갓 나온 싹들로 인해 푸른빛이 돌았다. 찬 기운이 도는 바람이지만, 지난 겨울의 차디찬 바람은 아니어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아산 장씨인 장영실의 묘는 그의 본향인 아산에 조성되어 있다. 장씨가 아산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시조 장서가 고려 중기에 혼란을 피해 송나라로부터 서해를 건너 이곳 아산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장서의 고향은 본래 중국 남쪽 장강 연안의 소주 혹은 항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려와 송의 관리나 상인들이 드나들던 영파와 가까이 있다. 개경 입구의 벽란도항에서 출발한 배는 영파에 도착하고, 영파에서 출발한 배는 벽란도항에 도착한다. 그러다보니 소주와 항주에는 고려와 관계 있는 유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마 장서도 이 뱃길을 따라 왔을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목포까지 죽 뻗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서평택나들목을 빠져나와 국도를 이용해 아산만 방조제를 넘거나, 서해대교를 넘어 송악나들목을 빠져나와 국도를 이용해 삽교천방조제를 건너면 아산시 인주면이 나온다.

이곳에서 지방도를 타고 문방리로 가다 보면 왼쪽 길 옆으로 ‘아산장씨시조공묘소입구 장영실과학선현추모대’라고 두 줄로 돌에 새긴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이번에는 두 줄로 ‘아산장씨시조공묘소 과학자장영실선생추모비’라고 쓴 철제 이정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가다 만난 마을 노인에게 들으니, 장영실의 묘는 몇 년 전에 조성된 가묘라고 한다.

차 한 대가 드나들 만한 좁은 길을 가다 보니 야트막한 산자락에 봉분 2기가 보였다. 2기의 봉분은 위 아래로 조성되어 있는데, 위에 있는 것이 시조인 장서의 묘이고, 아래의 것이 장영실의 가묘이다. 무덤은 둘 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역에서 앞쪽 저 멀리에는 삽교천방조제로 인해 호수로 변한 삽교호가 있고, 앞쪽 왼쪽으로는 마을이 보였다. 무덤 주변은 소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제법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묘를 둘러싼 호석과 그 주변에 있는 상석과 인석, 망주석과 돌계단 등 대부분의 석물들은 만든 지 오래되지 않았거나 최근에 조성한 듯 보였다. 잔디도 정연하게 깔려 있어 관리를 잘 받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30분 남짓 묘역을 돌아보고는 마음이 왠지 휑하다. 바닷 바람에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사실 장영실의 묘가 가묘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어느 기록에도, 심지어 아산장씨 족보에도 나타나지 않는 장영실의 묘가 시조묘 아래에 있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오면 장영실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었다.

세종의 능인 여주 영릉 앞에 놓인 과학 기기는 장영실의 위대성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도록 명한 세종의 위대성, 애민정신을 얘기하려고 전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15세기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의 위대성을 얘기할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가묘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창조한 우수한 과학 기기들을 통해서 해야 하는가? 

장영실의 무덤은 어디에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미천한 관노에서 종3품 대호군에 올랐다가 다시 내쳐진 과학자이니 그의 무덤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지금껏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설, 한식, 추석이 되면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다. 그렇다고 없는 무덤을 다시 만들어가면서까지 하지는 않는다.

장영실의 가묘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의 후손이니 자긍심을 갖자’라는 취지일 것이다. 그런데 허구 앞에서 그 누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라진 묘는 복원할 수 없지만 기기는 근거 자료를 바탕으로 얼마든지 복원이 가능하다. 장영실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가묘 복원이 아니라 그의 위대성을 알고 느낌을 줄 수 있는 과학적인 창조물이어야 맞다.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문화재들을 설명하는 입간판의 제목이 예전과 달라졌다. 특히 예전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미약하거나 불확실할 묘에 대해서는 ‘전 ○○○의 묘’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전해 내려온다는 의미의 ‘전(傳)’자를 슬그머니 빼고 ‘○○○의 묘’로 지칭한다. 그 중에는 연구를 통해 실제에 부합하는 내용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근거 없는 내용들이다.

내려가는 길에 아까 만난 노인의 뒷 이야기가 귓전에 맴돈다.

“저거 가묘인 건 우리나 알지 우리 죽으면 다 진짜로 알지.”

불확실한 것이나 허구를 확실한 것 사실로 둔갑시키는 세태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 우리나라의 볼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주 영릉  (0) 2010.10.12
완도 청해진  (0) 2010.09.05
강화외규장각  (0) 2010.03.16
전등사 나인상  (0) 2010.03.04
안성유기의 번창2  (0) 2009.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