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완도 청해진

윤의사 2010. 9. 5. 16:06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15세기에 유럽의 에스파냐는 무적함대라는 막강한 해군을 기초로 세계 여러 나라에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주름잡았다. 국제 해양 무역을 주름잡던 에스파냐의 기세가 꺾인 것은 1588년에 영국에 의해 도버해협에서 패배하면서 ‘대서양의 지는 해’ 신세가 되었다. 이제 해상 무역은 영국이 주름잡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가 되었다. 영국은 약 350년간 바다를 지배함으로써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전,

우리 나라에서도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를 연결하고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무역권을 확대하면서 바다의 왕으로써 해상 무역 왕국을 건설한 영웅이 있었다. 바로 완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장보고장군이다.

 영웅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6시간에 걸친 여정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 채 해남을 거쳐 완도대교에 이르렀다. 넓게 펼쳐진 남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파도를 향해 호령하던 장보고장군을 생각해보았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읍내를 향해 11KM를 가다보면 장좌리가 나온다. 원래 장보고장군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장재리이었으나, 장좌리로 바뀐 곳이다. 이곳에는 청해초등학교가 있고, 왼쪽 마을 건너 장보고장군의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장도가 나타났다. 아마 장보고장군이 있던 섬이라 장도가 아닐까 한다. 장도는 인기 드라마 ‘해신’이 방영된 이후 관람객이 증가하자 나무로 다리를 만들고, 부근에 장보고기념관까지 만들었다.

청해진에 대한 발굴작업이 1991년부터 있었는데, 장도에서 흙으로 쌓은 성터와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와 철제 무기들이 나왔다. 또한 중국에서 생산된 청자 조각들이 나와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섬주위에는 방어용으로 통나무로 목책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서양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성둘레에 설치했던 작은 개울 모양의 해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장도꼭대기에는 동그란 모양의 숲이 있다. 숲속에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송대장군당으로 불리워졌다. 장보고장군의 호가 송대이기에 장보고 장군을 모신 것이지만, 이전에는 송징이라는 사람의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송징은 삼별초가 몽고에 항복한 고려 정부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진도로 내려온 배중손을 도왔으며, 어려운 완도 백성들을 많이 도와주었던 장군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송징을 모셨지만, 실제 살았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여, 몇 해전부터 장보고장군, 장군의 친구인 정년, 그리고 송징을 함께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당제이야기는 시간가는 줄을 모르게 하였다.

제사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지낸다. 새벽에 물이 빠져나가는 틈을 타서 걸어서 당집까지 간다고 한다. 북과 꽹과리 등 악기를 연주하며 ‘청해장군 장보고’기를 앞세우고 장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섬주위를 세 바퀴를 돈 후에 섬꼭대기의 당집으로 간다. 이곳을 다시 세바퀴 돌고, 미리 선출된 제주 등이 당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주는 음력 1월 3일에 뽑는다. 본인의 뜻에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선출하는 제주는 상을 입은 사람이나 자식을 잃은 사람은 안되고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주가 되면 담배나 술을 금해야 한다. 1월 7일부터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상황봉 계곡의 샘물로 목욕을 해야만 했으나, 오늘날에는 손발을 씻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화장실갈 때 신는 신발과 일상 생활에서 신는 신발을 구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제사에 필요한 비용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걷는다. 음력 1월 14일에 제주집에 모여 음식을 준비한다. 제사는 장보고장군의 혼령을 위로하면서 자신들의 소원과 풍년, 풍어를 기원한다. 제사가 끝날 때가 되면 장도 주위에는 밀물 때문에 바닷물이 차있다고 한다. 그러면 배를 타고 장좌리로 돌아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집안의 평안을 빌어준다. 완전히 마을의 가장 큰 축제라고 하겠다. 마을 사람들이 장보고장군의 당제를 지내면서 서로 화합하고 앞날의 행복을 비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마을 제사의 한 단면을 알려주고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현실에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완도에는 장보고장군이 활약했던 곳이라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많았다. 장보고장군은 신라의 유학생과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의 산동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지어, 다른 나라에서 겪을 지도 모르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신라 사람끼리 모여 풀도록 하였다. 이 법화원을 본떠서 완도에도 지었으나, 지금은 터만 전하고 있다.

 장보고장군은 바다의 도둑들인 해적이 나타나면 배를 출동시켜 잡아들였다. 해적의 숫자가 많자, 감옥을 만들었으나, 역시 터만 남았으니 ‘옥당터(獄堂터)’요, 청해진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준 ‘청해정터’, 그리고 장보고장군 가족들의 무덤으로 전하는 ‘장보네 묘’가 있다. 그러나 염장에 의해 죽음을 당한 장보고와 이에 대한 반발로 난을 일으킨 부하 이창진 등이 신라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해진에 있던 백성들도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벽골제로 강제 이사를 하였으니, 끝내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무너진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이 많았으니 장보고장군과 가족의 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어 ‘장보네 묘’는 단지 전설상의 무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해상 무역의 영웅을 존경하는 완도 사람들이 무한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장보네묘는 완도 사람들의 영원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제 완도는 그 옛날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아니라 김과 미역 생산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풋풋한 미역과 김냄새를 맡으면서 1000년 전의 해상 왕국의 부흥을 외쳐본다. 지하자원이 없는 우리 나라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해상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이다. 장보고 장군의 개척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 속의 한국을 건설하는데 작은 힘이 되도록 각자 노력하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진도로 돌렸다.      


청해진 전경 

 

 

청해진 성터 

 

 

 청해진에서 바라본 남해 전경

 

'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 우리나라의 볼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인 충렬서원  (0) 2010.10.25
여주 영릉  (0) 2010.10.12
아산 장영실 유허를 찾아  (0) 2010.04.25
강화외규장각  (0) 2010.03.16
전등사 나인상  (0) 2010.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