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용인 심곡서원

윤의사 2010. 10. 27. 07:54

중종은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간섭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였다. 조광조가 정치를 새롭게 바꾸려 들자, 지금까지 권력을 잡고 온갖 혜택을 누리던 관리들은 그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던 참에 조광조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웠다는 훈구 대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상 공도 세우지 않고 혜택만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밝히자, 훈구파 대신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에 훈구파였던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이 궁궐에 있는 나뭇잎마다 꿀을 칠하여 벌레가 파먹게 했는데, 그 모양이 한결같이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란 글씨를 나타냈다. 그러잖아도 조광조의 개혁이 너무 지나치다 싶어 주저하던 중종은 이 일로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결국 조광조는 훈구파들의 모함으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함께 개혁을 이끌던 다른 젊은 학자들도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귀양을 갔다. 이것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심곡서원이 세워진 것은 조광조가 죽은 후 130여년이 지난 1650년이다. 조광조의 후손들과 유림들이 조광조의 묘가 있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203-2에 서원을 세우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모신 학포 양팽손도 추가 배향되면서 심곡(深谷)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흥선대원군때 47개의 서원을 남기고 모두 없앤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심곡서원도 살아남았던 유서깊은 서원이었다.

심곡서원의 중심은 일소당이다. 서원의 강당이자 교육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을 일소(日昭)라고 한 것은 조광조가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백일임하토 소소조단충(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이란 시를 남겼다. 곧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에서 한자씩을 따와 ‘일소당(日昭堂)’이라고 하였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원래 조광조의 위패는 정몽주를 모신 충렬서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 67종 486책을 보관하던 장서각은 1985년에 전부 도난당하여, 지금은 <정암집(靜庵集)>과 <조선사(朝鮮史)>만 남아 있다고 한다.

신도시에 둘러쌓인 심곡서원, 개발의 물결에 우리 문화재가 다치지 않을까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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