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427

수원 화성 장안문

장안문은 화성(華城)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된다. 보통 남문을 정문으로 여기지만, 한양에서 정조가 장안문을 통해 화성행궁에 입성하기에 장안문이 정문인 것이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불렀던 이름이므로, 중화사상의 영향이면서도 정조대왕의 자신감의 표현인 듯 하다. 한편으로 장안문 안은 서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수도인 한양에서 화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장안문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문)을 만들었고, 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는 충분한 너비와 일반 수레가 서로 비껴 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확보하였다. 장안문의 특징은 옹성과 문 좌우로 만들어 놓은 적대이다. 옹성은 성의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이 성문을 쉽게 부수지 못하..

수원 화성박물관

22일부터 진행 중인 화성문화제, 화성박물관에 가면 정조가 능행차를 할 때의 모습 등이 재현되어 있다. 정조 이후 조선왕조에는 백성들과 나라를 지켜낼 군주가 없었다.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대됨)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치를 떨면서 순조의 명을 받아 대리청정을 하여 정조의 르네상스를 계승하는 듯 하였다. 그는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벌을 신중하게 하여 억울하게 벌을 당하지 않게 하였다. 모든 백성을 위하는 위민 정책을 펼치려 하였으나,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을 넘어서고, 조선시대까지 선진국이었던 중국마저도 넘어선 지 어언 30년. 그러나 ..

수원 화성장대

어제(9월22일)부터 화성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경기교총에서 직장 동료의 자녀가 혼인을 하여, 화성을 올라갔다. 수성고등학교 3학년 때 예비고사가 끝나고, 화성장대를 찾는 것이니 37년 만인 듯하다. 수원은 몰라보게 변화하였다. 120만의 거대도시로 성장한 수원의 기반은 화성을 건축한 정조대왕과 정약용의 공인 듯 하다.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화성 안내도 화성의 5개 포구 중 하나인 서포루, 안쪽에서 바라본 서포루 성 밖에서 바라본 서포루 성벽의 모습 수원장대 수원장대에서 바라본 화성행궁 서노대, 오늘날 다연발 포처럼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장치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수원 화성 행궁2

수원 행궁은 1996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고종 11년(1874)에 2만 냥을 들여 화성 행궁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잘 보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도립병원이라고 할 자혜의원이 건립되고, 학교와 농산물 연구소 등이 차례로 들여와 1923년에는 거의 사라졌었다. 필자가 수원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행궁 자리에 수원 경찰서와 경기 도립병원, 신풍초등학교, 수원터미널 등이 있었다. 수원 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의 치소로 사용되었다. 전체 557칸으로 의주나 남한산성, 온양의 행궁에 비하여 규모가 크다. 동향으로 배치된 화성 행궁의 정문은 신풍루이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를 세운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광주 문형산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2박3일간 광주 오포에 있는 노동교육원으로 연수를 다녀왔다. 느끼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힐링으로 실시된 등반이 좋았다. 교육원은 문형산이 보듬고 있다. 문형산은 광주와 분당을 사이에 두고 완만하게 오르는 497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원래 '문형'은 조선시대 대제학의 별칭으로 선비가 많이 배출되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문형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옛부터 문형산 부근에 홍수가 나서 마을이 모두 잠겨도 이곳 문형산 정상만은 잠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 크기가 무명 한필을 말릴수 있는 정도의 넓이라 해서 '문형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북으로는 영장산과 남으로는 불곡산과 연결되어 있다. 문형산 정상, 휴대폰이 흔들렸다. 정상에서 바라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