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19

오산 세마대

삼남길 7,8코스에는 세마대와 황구지천이 있다. 오산시에 권율장군과 관계있는 세마대가 있다. 독산성이 세마대가 된 유래는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로 있는 권율 장군은 전라도의 관군을 모두 모아 왜군과 싸우고자 하였다. 때마침 평양성을 탈환한 명나라 이여송 군사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 온다는 말을 전해듣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한양 탈환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권율 장군은 휘하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순변사의 본영이 있는 광주(경기도 광주)로 출발했다. 그러나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남으로 내려오던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는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는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권율장군은 임시로 군사들이 머물 곳으..

파주 혜음원지

의주길 2코스를 걷다보면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는 사적 제464호인 혜음원지가 있다. 1999년 ‘혜음원(惠陰院)’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9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 의하면 '예종 22년(1122)에 건립'된 국립 숙박시설이었다. 혜음령은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의주길의 통로로 교통의 요지였기에 조선시대에도 중시되었던 곳이다. 원은 공무상 출장을 가는 관리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 달리 숙박시설을 사찰이 관리하였다. 더구나 이곳 혜음원에는 국왕이 남경을 시찰할 때 머무는 행궁도 함께 있었다. 발굴 결과 혜음원에는 고려시대 절터와 원(院), 그리고 국왕이 개성에서 남경(서울)으로 가는 도중에 머물던 행궁이 있었다. 산 능선을 계단식으로 깎고 다져서..

영남길

조선시대 서울에서 일본으로 이동하는 길로 ‘조선통신사길’ 또는 줄여서 ‘사행길’로 불렸던 영남길이 있다. 영남길은 조선시대 한성과 동래를 잇는 간선도로로 지난 1910년까지 존재했다. 1607년부터 200여 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되어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해준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에 전해주는 중간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통신사는 한류의 시초라 하겠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표지석이 많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되는 것은 많지 않다. 표지석을 만들었으면 관리를 잘하고, 시민들에게 홍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용인시청 앞에 설치된 사행길 표지석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동래를 잇는 영남길 중 석성산을 넘어 시청 앞을 지나 양지로 향하는 곳에 세워진 표지석, 하지만 ..

석성산을 가다

오늘은 학생들과 함께 석성산을 갔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서울가는 한양길이었다. 석성산이라는 말은 이곳에 할미산성(고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이니 오래된 성이라고 하겠다. 돌로 샇은 성이 있다하여 '석성산'이라고 하였다. 약 30여명의 학생을 이끌고 석성산을 갔다. 오랜만에 풀냄새와 나무냄새에 흠뻑 취해 힘든 줄도 모르고 정상을 향해 갔다. 학생들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 요즈음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것, 20년 후의 모습 등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 덧 정상에 도달했다. 아이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도 많이 나눈 하루였다. 일년에 2-4회씩 하는 행사지만 할 때마다 의미가 남달랐다. 석성산 표지석 석성산에서 바라본 동백 석성산에서 바라본 포곡(나무가 가려 삐죽 보이는 아쉬움이 있다.)

성남 판교의 항일의병운동기념탑

대얼마 전 성남 판교에 항일의병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한제국 말기의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쓴 애국지사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된 정미7조약 등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은 을사늑약을 전후해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의병장 중에는 성남 판교에도 있다. 바로 동천 남상목 선생이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 각종 전쟁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낙생면 하운산리의 산림을 마구잡이로 벌목하면서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

김대건 신부 生居地, 은이성지

김대건은 조선 유교 사회의 보수 세력에 의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를 널리 알리는 데 온 몸을 바쳤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책임을 다한 참된 신앙인일 뿐만 아니라, 어둠의 장막을 뚫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간 개척자였다. 김대건의 어릴 때 이름은 재복,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김대건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여 증조할아버지가 1814년에 순교하였다.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용인 양지면 은이성지로 숨어들었다. 훗날 그의 아버지도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김대건은 이처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려는 꿈을 키웠고, 깊은 신앙심으로 기꺼이 시련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순조 때 조선 교구가 만들어지고 신도들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조선인 신부에 대..

실학을 체계화시킨 유형원

유형원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황석마을에 있는 정배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유형원의 묘는 사망 직후에 만들어졌다가 1971년에 묘역을 다듬으면서 41M의 곡장을 만들었다. 봉분 앞으로 경계석이 정돈되어 있으며, 경계석의 중앙 부분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봉분의 오른쪽에 176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다. 비의 총높이는 160㎝, 비신 높이 136㎝, 폭 59㎝, 두께 23㎝이다. 봉분의 양쪽에는 금관조복을 착용하고 있는 문인석이 있으며, 신체의 사이즈가 맞지 않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모순을 주장하는 유형원처럼 문인석의 얼굴도 웃음을 주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 효종 때의 실학자이다. 그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학문의 실용성을 강조해 실학 발..

이산 정조대왕의 원찰을 찾아서

가장 가까운 곳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곳이 바로 용주사와 융건릉이다. 이곳 출신이라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용주사와 융건능으로 소풍을 수없이 갔다. 그때만 해도 왜 이곳으로만 가야하나 지겹다는 생각도 하였지만 지금은 행복한 지루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만들어진 갈양사인데,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절이 없어졌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은 것이다. 정조대왕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설법을 듣고 이에 크게 감동하여 부친인 사도세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하는 화산으로 옮겨와 ..

양수리 정약용 선생 생가와 팔당호

평해길 제2길의 정약용 선생 생가와 팔당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다 양평인터체인지를 벗어나면 시원스런 한강(漢江)과 함께 드라이브가 시작된다. 다른 지역과 달리 상수원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물이 참 맑으면서 공기 또한 좋아 가슴이 후련할 정도다. 양평방면으로 6번 국도를 따라 20여분을 가니 팔당댐이 나온다.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있다보니 늘 교통이 지체되는 곳이지만 용암대교의 개통(開通)으로 확 트여 더욱 정다산선생묘를 찾아가는 기분이 난다. 팔당댐을 지나 3KM를 지나면 중앙선 철교밑을 지난다. 철교를 지나자마자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다산선생의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마을 입구에는 마재 마을이라는 비석이 눈에 띈다. 비석에는 ‘옛부터 천하의 재사들이 문밖 제일 마재라 일컫던 고장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