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평해길

양수리 정약용 선생 생가와 팔당호

윤의사 2006. 3. 22. 18:58

평해길 제2길의 정약용 선생 생가와 팔당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다 양평인터체인지를 벗어나면 시원스런 한강(漢江)과 함께 드라이브가 시작된다. 다른 지역과 달리 상수원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물이 참 맑으면서 공기 또한 좋아 가슴이 후련할 정도다.

 양평방면으로 6번 국도를 따라 20여분을 가니 팔당댐이 나온다.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있다보니 늘 교통이 지체되는 곳이지만 용암대교의 개통(開通)으로 확 트여 더욱 정다산선생묘를 찾아가는 기분이 난다.

 팔당댐을 지나 3KM를 지나면 중앙선 철교밑을 지난다. 철교를 지나자마자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다산선생의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마을 입구에는 마재 마을이라는 비석이 눈에 띈다. 비석에는 ‘옛부터 천하의 재사들이 문밖 제일 마재라 일컫던 고장이라. 어찌 경관뿐이랴.’라는 글귀가 보인다. 정다산선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500M정도를 가면 정다산선생묘에 도착했다.

 정다산선생의 묘소(墓所)로 올라가는 오른쪽으로 선생이 어릴 적과 유배 후에 여생(餘生)을 끝마칠 때까지 생활하신 생가 여유당(與猶堂)이 있다. 미음자 양식의 생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떠내려가 197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한강물을 보면서 정다산선생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곳이기에 ‘여유당’이라고 한 모양이다. 본래 여유당은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여(與)함이여, 마치 겨울에 냇물을 건너 듯이, 유(猶)함이여, 마치 네 이웃을 두려워하듯이.’에서 따온 말이다. 그래서일까? 양반집인 여유당의 담은 다른 집과는 달리 낮았다. 정다산선생이 허물없이 백성들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고자 했던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여유당을 나와 언덕으로 오르는 옆에는 대나무가 많이 보였다. 부패(腐敗)한 관리들을 꾸짖으면서 한평생을 옳은 길만을 가려는 선생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듯 하였다. 계단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서면 시원스레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바로 정다산선생의 묘소가 있다. 부인과 합장한 묘소로 한강이 겪은 온갖 일들을 이곳에서 바라보면서 때로는 기뻐하시고, 또 때로는 안타까워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대가 있고, 오른쪽엔 비석(碑石)이 2기가 서있다. 비석에 쓴 글은 선생 자신이 회갑을 맞은 순조 21년(1821년)에 지은 ‘자찬묘지명’을 새긴 것이다. 봉분에서 가장 멀리 혼유석이 생가를 지켜보면 정다산선생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알려주는 듯 하다. 묘소는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선생의 말씀에 따라 가장 간결하면서 존경의 예를 표시하면서 만들어졌다.

 묘소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가면 사당이 있다. 사당의 정문은 외삼문이며, 그 안에 정다산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도사(文度祠)가 있다. 서양 화가인 설경숙님이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에 문도사는 잠겨있어 영정을 보기가 어려운데 다산기념관의 영정과 같은 것이다.

 문도사에서 남쪽으로 오면 다산기념관이 있다. 정다산선생의 업적과 자취를 나타내주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18년간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쓰신 책을 비롯하여 거중기, 녹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방 관리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기록한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자신의 관리 생활에서 얻은 경험(經驗)과 지식(知識)을 총동원하여 국가 경영에 관한 모든 법을 적절하고도 모범이 될만한 것들을 쓴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남겼다. 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형벌을 공평히 하여 억울함이 없게 해야한다는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썼다.

 선생은 9남매의 자손을 두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식은 단지 3남매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홍역과 천연두로 큰 고생을 하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큰 아픔이었으며, 정다산 자신도 어릴 때 홍역으로 큰 고생을 하다가 이몽수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홍역과 천연두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온 천연두 치료책이 바로 《마과회통(麻科會通)》이다. 그밖에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아방강역고》등 약 500여권의 책을 남겼다.

 정다산선생의 또 다른 업적은 바로 과학의 발명이다.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는 마음에 행궁을 쌓았다. 옛날에는 성을 쌓으려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라야만 하엿다. 그래서 백성들의 불만이 많았는데, 선생이 만든 거중기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림으로써 백성들의 노고를 줄일 수가 있었다. 선생의 과학적 창조정신과 더불어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을 엿볼 수가 잇다. 거중기와 더불어 화성을 쌓는데 사용된 녹로가 있다.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이었다.

 이곳에는 정다산선생의 시와 그림도 함께 있다.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찾고자 함일게다. 그림과 시속에는 은은한 차의 향기가 나온다. 기념관에는 선생이 강진에 유배 중일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과 몸을 달래고 시와 그림을 그리던 천일각이 있다. 이와같이 강진에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묘소를 떠나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외국의 것을 쫓아가는 것을 꾸짖는 선생의 시를 되뇌어본다.

 

     슬프다 이 나라 사람들 성격

     주머니 속에 갇힌 듯 생각이 좁구나.

     남의 것 모방에 급급하다가

     언제 자기 것을 갈고 닦으려나.

     어리석은 관리들은 임금만 떠받들고

     모두 함께 존경하자고 법석을 떠네.

팔당역에서 내려 500m정도 걸으면 예봉산 등산로입구가 나온다. 그 앞에 세워진 표지석

 

마재 마을의 옛 중앙선 능내역
정약용 선생 부부묘
정약용 선생 생가
여유당 현판

 

팔당호 풍광

'경기옛길 > 평해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음 이덕형  (0) 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