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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윤의사 2006. 5. 1. 19:19
돈, 즉 화폐는 상품 교환을 위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물로서 어떤 물건의 가치를 매기거나, 물건값을 치르는 도구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시대에 이미 화폐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는 고조선의 <8조법금>에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데, 만약 용서를 받으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마한과 진한, 동옥저에서 동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삼국시대에도 경제가 발전하기는 했지만 화폐를 사용한 모습은 찾을 수가 없으며, 물물교환이 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신라에서는 금, 은, 무문전 등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물물교환이나 물품 화폐 유통이 주로 이루어졌던 원시 자연 경제 체제에서 사용된 자연발생적 교환 수단, 즉 실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물품 화폐와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화폐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다. 성종 15년(996)에 건원중보라는 철로 만들어진 엽전이 만들어졌으나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 뒤 숙종 때에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은 한 근으로 만들어진 은병은 최하 쌀 10가마에서 최고 50가마에 이르는 높은 가치를 지닌 화폐였으나 가짜 은병이 만들어져 가치가 떨어졌다. 이것을 대신할 화폐로 지폐인 저화가 등장했으나 이것 역시 가짜 화폐가 만들어졌으므로 사용이 활발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는 이밖에 해동통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급자족의 경제에 머무르고 있는 고려시대에는 경제규모가 매우 적었으므로 결국 화폐의 사용은 활발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저화를 계속 사용하는 한편, 조선통보, 전폐(箭幣) 등 동전을 만들어 널리 사용하려고 하였다. 동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구리가 필요했다. 이에 유교를 믿게 하면서 불교를 탄압함에 따라 다 망가진 절에서 범종을 가져다가 동전의 재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관리들은 저화를 사용하고, 동전의 사용은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동전은 가짜를 만들기가 쉬워 많은 범죄자들을 낳기 때문이었다. 이미 조선전기에 동전을 가짜로 만드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였던 것이다. 관리들의 걱정과는 달리 조선전기에는 동전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아 동전을 가짜로 만드는 사건은 없었던 듯하다.

조선후기에 김육은 말했다.

“상평통보를 만들어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 경제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용된 상평통보는 초기에는 사용이 활발하지 못했으나 숙종 이후에 널리 사용됨에 따라 교환 수단이자, 돈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됐다. 이에 가짜로 화폐를 만드는 사람이 나타났다.
예를 들자면 숙종 22년(1696)에 판서를 지낸 이경회의 손자며느리가 나라의 허락도 없이 개인적으로 화폐를 만들다가 잡혔으며, 함께 만들었던 사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여자의 몸으로 화폐를 가짜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물며 남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오늘날에도 화폐를 가짜로 만드는 사람은 국가 경제를 어지럽게 만든다고 하여 무거운 벌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화폐를 가짜로 만들고 있으니,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돈의 힘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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