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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윤의사 2006. 4. 26. 19:17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분지의 모든 물이 청계천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한강으로 흐른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 태조가 서울을 수도로 정했을 당시에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주위의 집들이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상시에는 주변 사람들이 공동 화장실로 이용해 물이 더러워져 매우 불결했다. 제3대 태종이 홍수를 막기 위해 처음으로 하천 준설 공사와 하천 양쪽 둑에 나무를 심는 치수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준설 공사와 하천 양쪽 둑의 일부를 돌로 쌓으면서 청계천을 직선으로 바꿔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도 하였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水標橋)·오간수교(五間水橋)·광교(廣橋)·영미교(永尾橋)·관수교(觀水橋)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다리밑에는 거지들이 생활하였다. 조선시대의 형벌 가운데 ‘경'이 있었다. ‘경'이란 얼굴이나 팔뚝에 살을 따고 흠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벌로, 조선시대 영조(재위:1724∼1776) 때까지 행해졌다. 경의 형벌을 받은 사람이 개천가의 다리 밑에 모여 살면서 거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체면과 가문을 중시했기에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청계천에 모여 공동생활을 했다. 주로 청계천 바닥의 흙을 쌓아 일군 인공산인 조산(造山)과 광교, 수표교, 복청교 아래 등에 터를 잡아 모여 살았다.
일단 거지가 되면 본명은 버리고 별명으로 서로를 불렀는데, 우두머리인 꼭지딴이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예를 들면 갈매기, 솔가미(소리개), 독수리, 부엉이, 쟁끼(장끼), 까마귀, 까치 등이다.
이들은 얻어 먹은 것 외에 남들이 꺼리는 뱀·두더지·지네·두꺼비·고슴도치 등의 약재를 잡아 내의원이나 혜민국에 바치면서 대가를 받았다. 도한 상갓집이나 잔치집에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상여가 나갈 때 선두에 가면서 행렬을 인도하면서 대가를 받기도 했다. 개천에 살다보니 미꾸라지를 독점으로 추어탕집에 공급해 그 대가를 지불받아 생활하기도 했다. 일본의 침략기에 ‘거지왕 김춘삼'과 같은 인물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개천에서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8·15광복 후에도 청계천의 유지관리에 힘써 왔다. 1958년 6월부터 복개공사에 시작해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2003년 7월1일부터 2005년 9월까지 2년여 동안 청계천 도로위의 삼일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한 청계천 포장도로를 걷어내는 공사를 했다. 이제 10월이면 예전의 청계천이 시민의 쉼터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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