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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리는 언제 들어왔나?

윤의사 2006. 4. 2. 09:24
코끼리는 조선시대 태종 11년(1411)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일본 국왕이 바친 이 코끼리는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사복시(司僕寺)에서 맡아 길렀다. 그런데 1년쯤 지난 후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라는 사람이 그 코끼리를 놀리다가 깔려 죽었다. 그러자 조정에서 죄를 지은 동물을 벌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결국 그 코끼리는 순천 앞바다의 장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 년 후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가 날로 여위어 가며,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린다는 장계를 조정에 보내왔다. 이를 읽은 임금이 코끼리의 죄를 사면해 주었고, 7년 동안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번갈아가며 사육했다.
이 코끼리는 세종 3년(1421)에 충청도 공주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하루에 쌀 두 말과 콩 한 말을 먹어 치우는 엄청난 식성인데다 먹이를 주던 종을 발로 차 죽이자, 충청도 관찰사는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가려서 보내고, 병들어 죽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한 뒤 하는 수없이 코끼리를 또다시 섬으로 유배보냈다고 한다.
원숭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 6월이다. 왜구들이 납치해 간 조선 남녀 650여 명을 송환할 때 일본 사신이 태조 이성계에게 원숭이 한 마리를 진상한 것이다.
그 뒤 세종 때 전염병이 돌아 말(馬)이 죽어가자 어느 학자가 일본에서는 마구간에 원숭이를 함께 기르기 때문에 말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 말을 듣고 일본에서 원숭이를 들여와 그 중에서 여섯 쌍을 한라산에 방목했는데, 이 때는 번식에 실패했다.
성종 임금 때에는 임금이 진귀한 애완동물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올라와 그 뒤로는 원숭이를 더 이상 들여오지 않기로 했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정유재란때(1597) 명나라 장수 형개가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충청도 직산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 원숭이 3백 마리를 일본군의 진중에 풀어 놓자 원숭이가 마구 날뛰어 일본군이 혼란스러워 싸움에 유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개장한 동물원은 1907년에 창경궁에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순종 임금의 오락장으로 설치됐다가 1911년에 일반에 공개됐다. 임금이 살았던 성스런 궁궐에 동물원을 만들어 이름조차 ‘창경원’으로 개칭한 데는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간악한 흉계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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