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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소방서

윤의사 2006. 5. 3. 18:34
우리나라에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평왕 18년(596)에 영흥사(永興寺)에 불이 나서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문,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소방이 전문적인 행정 분야로 분화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화재를 사회적 재앙으로 인식하여 국가가 나선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 시대 이래로 화재를 예방하는 벽사적 기능으로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인 망새(치미라고도 함)를 세웠다. 사찰에서는 벽사겸 화재가 났을 때를 대비하여 연못을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남산에 화기(火氣)가 있다는 풍수 사상의 영향으로 화재에 대해 철저한 대비를 했다. 이 때문에 숭례문(崇禮門)의 현판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달기까지 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한양을 건설하면서도 인접한 가옥과 가옥 사이에 화재 예방담(방화장:防火墻)을 설치하고 요소마다 우물을 팠으며(궁궐에는 ‘드므'라는 물통이 설치되었다) 방화기기를 설치하여 화재의 예방과 진압에 노력했다.
세종 8년(1426) 2월에 화적(火賊)의 방화로 큰 불이 일어나자, 곧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여 화재의 방지와 천거(川渠:물의 근원이 가까이 있는 내)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게 하였고, 화재가 난 틈을 타서 물건을 훔쳐가는 도적들을 색출하게 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판관(判官) 각 6인을 두었다.
그러나 앞서 1422년 2월에 설치한 바 있는 성문도감(城門都監)과 함께 금화도감이 할 일이 없어짐에 따라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라 하고, 수성·금화 업무 외에 천거·도로·교량 등을 수리하거나 고쳐 짓는 일도 맡게 하였다. 그 뒤에도 수성금화도감은 할 일이 없자, 세조 6년(1460) 5월에 도감을 폐지하고 수성의 업무는 공조(工曹)로, 금화의 업무는 한성부로 이관했다. 그러다가 소방 업무가 해이해져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도둑질을 위한 방화가 많아지자, 성종 12년(1481) 3월에 수성금화도감이 부활되었으며, 더 나아가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격상되었다.
금화도감은 비록 상비 소방 관서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나, 화재를 방비하는 독자적인 기구를 갖춘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서로 볼 수 있다. 그 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경찰 기구에서 소방 업무를 분담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화재와 관련된 법률을 엄격히 정해 놓았다. 태종 17년(1417) 호조의 건의에 의하여 실시한 금화령(禁火令)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포함돼 있었다.
실수로 자기 집을 불태운 자는 태장 40대, 다른 집까지 불태운 자는 태장 50대, 종묘 및 궁궐까지 불태운 자는 목을 졸라 매어 죽이는 교살형(絞殺刑)에 처하고, 궁전 창고의 수위나 죄인을 간수하는 관리들이 불이 일어났다고 해서 장소를 떠나는 경우에는 곤장 100대의 처벌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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