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5월6일 오늘의 역사, 화가 박수근이 세상을 떠나다

윤의사 2025. 5. 6. 15:43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 밀레의 '만종'에 감동 받아 밀레와 같은 서정적 일상을 그려내는 화가가 되기로 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가려고 했다가 가정 형편상  포기하였다.

박수근의 재능을 알아본 보통학교 시절의 일본인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을 권유해 18세 되던 1932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로 입선하였다.

박수근은 동 시대의 다른 화가들이 유학이나 스승을 통하여 그림을 배운 것과 달리, 독학으로 공부해 한국적 수채화를 남겼다.

18세에 화가가 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일용직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림 그리는 것을 계속해 1936일하는 여인’, 1938여일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이때 평양시청의 공무원이 되고 혼인도 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아내를 모델로 한 모자’, ‘실을 뽑는 여인등의 작품을 남겼다.

1946년 강원도 금화군 금성면 금성여중의 미술 교사로 있었으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작품 활동이 어렵자, 6.25 전쟁 때 서울로 남하하였다.

다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미8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활하다가 1953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이 특선을, 이어 여러 작품이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어 연필 살 돈이 없자 딸이 쓰던 몽당연필로 데생을 하기도 했다.

1959년 오늘날 롯데호텔에 자리한 반도호텔의 반도화랑을 운영하게 된 이대원 화가의 도움으로 전시를 하면서 그의 그림의 우수성을 알게 된 미국인들이 그림을 사면서 한국적 서정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마가렛 밀러 부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해 그의 작품을 팔아주기도 하고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게 했다.

이때 박수근에게 화가로서는 치명적인 백내장에 걸렸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수술을 하지 못해 결국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그럼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654 간염과 신장염 진단을 받았다가 같은 56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라고 말한 것처럼 서민의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 향토성 짙은 우리 민족의 서정시 같은 작품을 공간감이 무시된 채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운 듯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평생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기에 아들 성남씨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겠다며 공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개인 유작전에서 아버지, 저도 화가가 될래요.”라고 말하며 아버지처럼 독학으로 화가가 되어 국전에 7번 입선하였다. 박성남 화백의 아들도 화가이며, 박수근의 딸 인숙도 화가의 길을 걸으니, 3대가 화가 집안인 셈이다.

절구질하는 여인
빨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