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4월5일 오늘의 역사, 제1차 천안문 사태

윤의사 2025. 4. 5. 11:18

중국인의 존경을 많이 받는 인물은 바로 저우언라이 총리이다. 1976년 1월,  그가 죽자 마오쩌둥과 갈등으로 실각하였다고 생각한 중국인들이 추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를 싫어한 마우쩌둥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이 저우언라이를 비난하며 추모 행사를 방해하였다. 더구나 저우언라이 장례식에 참석한 사인방의 언행에 중국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4월 4일 청명절에 베이징 시민들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를 향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행진한 후 저우언라이의 자자필 비문이 새겨진 기념비에 화환을 걸고 추모했다. 그런데 사인방이 기념비에 있던 화환을 전부 철거해버렸다.

그동안 문화대혁명으로 경기침체에 따른 고통을 받고 살던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던 저우언라이  추모에 대한 사인방의 행위에 대해 분노한 중국인들이 4월 5일에 봉기하여 건물과 자동차 등에 불을 붙이는 등 폭력 시위를 하였다. 나아가 마오쩌둥 체제의 해체를 시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들 세력을 반혁명사건으로 판단하면서 공안과 군대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해산과 탄압을 하였다. 또한 4인방은 덩샤오핑 부주석에게 책임을 묻고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에서 배제하면서 실각시키고 화궈펑은 정식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2년 후인 1978년 11월 12일  중국공산당 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1976년의 사건을 재심의하였다. 그리고 11월 14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결정으로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원회는 '천안문 사건은 혁명적 행동이었다'라는 재평가를 하면서 덩샤오핑 등이 재기하였다.  이후 11월 25일 중공 중앙공작회의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이 공식적으로 천안문 사건은 혁명적 대중운동이었다고 평가하며 '천안문 사건'은 '4.5 운동'이라는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4.5 운동은 문화대혁명과 4인방에 반대하는 인민들의 혁명적 행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죽고난 후 그의 직속 후계자였던 화궈펑과 장칭을 비롯한 사인방도 실각되었다.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중국의 양극화로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불만으로 1989년 6.4 천안문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2차 천안문 사태는 시위국민들과 대화 조차 거부한 채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진압함으로써 1차 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이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례라고 하겠다.

저우언라이(출처:동북아역사재단)
덩샤오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