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3월 1일에 시작되었으며, 의주에서는 민족 대표 33인 중 한분인 유여대 선생이 자신이 설립한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의주서교회 공터에서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0일까지 27회의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29일 정오 12시경, 의주 고령삭면 구창동에 위치한 영산시장에서 장날을 맞아 약 3,000~4,000명이 참여한 의주지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최초 운동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연대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일제는 운동을 조기에 종식하고자 재빨리 탄압에 나섰다. 3·1운동이 시작된 지 한달 가까이 지속되면서 확산되는 터에 일제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이위해 영산시장 내 헌병주재소 헌병 2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2개 조로 나눠 만세운동의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의주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총을 쏘는 일제 헌병에게 돌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헌병의 총을 빼앗았다. 뒤이어 온 일제 헌병도 마찬가지로 주민들에 의해 총을 빼앗겼다. 총을 빼앗기는 모습을 본 헌병보조원 3명은 무려 60여발의 실탄을 만세운동을 부르는 주민들에게 난사했다. 그리고 탄약상자를 주재소 뒤편으로 가지고 도망치면서도 사격을 계속하였다.
일제의 무차별 사격에도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계속하며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주민들은 주재소로 가서 출입문과 창문을 부수고 무기고의 총기 등도 압수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병력 추가 지원으로 오후 7시 30분경에 뿔뿔이 흩어져야만 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의주 주민 등 7명이 총에 맞아 순국하였는데, 「영산시(永山市)에 이사(異事)」, 『독립신문』 (1920.4.20.) 기사에 실린 순국자 5명의 이름을 보면 장인국·김석운·황수정·허창준·백성아 등이다.
일제는 이들 사망자를 포함한 사상자를 최대 15명으로 집계하였고, 기타 41명의 참여자를 체포하였는데 이들 중 6명은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 처해진 사람들은 모두 고령삭면에 사는 농민들이었는데,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보안법위반과 소요죄 등의 죄목으로 길게는 징역 3년부터 짧게는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박병수 선생은 끝까지 자신이 3.1운동에 참여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강제 병합을 비판했으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된 것에 고무되어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기쁘게 만세를 불렀다고 하면서 일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국을 병합한 것을 지적하고 자신의 행위가 무죄라고 주장하며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참여를 정당화하였다. 박병수 선생은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1874년생으로 의주만세운동 당시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 선생은 2008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립기념관의 '1930년 3월 30일 의주학살사건의 전말과 의의'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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