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쉼터의 한국사

영주 부석사의 창건설화

윤의사 2019. 6. 23. 08:45

의상은 진평왕 47(625)에 진골 집안의 귀족의 가정에 태어났다.

열 아홉 살 때 경주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도중에 고구려 군사에게 붙잡혔다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0년 뒤인 661년에 다시 당나라의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양주(陽州)에 이르러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한 피로탓에 병을 얻게 되었다.

의상은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잠시 머무르며 병을 치료하였다.

그런데 유지인에게는 선묘(善妙)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의상과 함께 지내면서 의상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님과 제자라는 관계로 대하였다.

그래도 선묘는 의상에 대한 간병에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정성이 통했던지 몸이 완쾌하게 된 의상이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묘가 의상에게 말했다.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 한번 들려주시고 가십시오

의상은 선묘의 부탁을 쾌히 승낙하였다.
얼마 후 의상은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신라를 구하겠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문무왕 11(671)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의상은 전에 선묘와 약속한 대로 귀국길에 선묘의 집에 들러 인사를 나누려 하였다.

때마침 선묘는 일이 있어 나가고 없는지라 유지인 부부에게 말했다.

만나지 못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들렀다 갔다고 전해주십시오.”

선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유지인 부부는 안타깝지만 의상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선묘는 의상이 귀국할 때 자신의 집에 들르면 주려고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하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의상이 왔다가 신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선묘는 법의를 가지고 산동성 해안에 다다랐다. 이때 의상이 탄 배는 떠나고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선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가 법의를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하였다.

진심으로 조사님께 공양하오니 원컨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때마침 바닷바람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 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였다.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

선묘는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부석사의 선묘상

 

선묘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용이 되어 의상의 서해 바닷길을 호위하면서 안전하게 신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의상은 문무왕에게 당나라가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대비를 하게 하였다.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군과 힘을 합쳐 당나라 군사를 매소성(오늘날 의정부 부근)과 기벌포(금강 하구)에서 무찌르고 삼국 통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당나라를 쫓아낸 문무왕이 지리적으로 좋은 자리에 사찰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의상은 영주시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본 즉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일으킬 수 있는 명산임을 알았다. 의상이 절을 세우려고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면 다음 날 쓰러져 있었다.

의상이 고심하는 터에 하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선묘는 도개비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에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서 떨어뜨렸다.

의상이 절을 짓는 것을 방해하던 도깨비들이 큰 바위덩어리에 깔려 죽게 됨으로써 의상은 부석사를 무사히 짓게 되었다. 선묘가 하늘에서 던진 큰 바윗덩어리는 지금도 지면에서 떨어져 있다고 한다.

바로 도깨비들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절 이름이 부석사(浮石寺)’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오른쪽에 있는 바윗돌, 한문으로 부석(浮石)’이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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