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김종수의 역사이야기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 1편》

윤의사 2018. 12. 18. 20:05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장소에서 기생이었던 진향을
만났다.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그는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도피. 그때 백석의 나이 26세, 진향은 22세였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그는 진향이 사들고 온《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를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 그는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하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그는 괴로워하고 갈등했다. 그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1939년 만주로 떠나는데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자야는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그후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자야. 기명 김진향은 어려서 예쁘고 총명하고 새로운 것에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책임감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크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어쩌면 대단히 보수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녀가 선택한 길은 기생이었다. 

1939년 만주로 떠난 백석은 자나깨나 자야를 잊지 못했다.
눈이 푹푹 내리는 추운 어느 겨울날 백석은 펜을 들어 그리운
자야를 생각하며 한 장 한 장 원고지를 써 내려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녁히 와서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백석과 자야는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백석은 평생 자야를 그리워하다가 1996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는 1955년 한국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한다.

훗날 자야는 시가 1,000 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 했는데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이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내리는 날 자야는 그렇게 백석에게로 돌아갔다.

1996년, 나는 창덕궁, 수원화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작업
을 추진하고 있었다. 세계유산을 등재하려면 유네스코에서 나온
전문가의 실사를 받아야 한다. 저녁식사 장소를 고민하다가 문득
대원각이 떠올랐다. 당시 성북동에 있는 대원각은 한정식 음식점
이었다.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날 나는 예정시간보다 일찍
대원각으로 갔다.

주인께 인사나 드릴려고 안채로 갔다.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맞았다. 나이에 비해 단아해 보였다.
그때는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를 몰랐던 때라 간단하게 일상적
이야기와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왔다.

대원각은 평지에서 조금 올라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기억에 한옥이 꽤 여러 채 있었던 것 같았다. 전에 유명
요정이었다는 게 묘한 감흥을 느끼게 했지만 유네스코 전문가
에게 이런 저런 우리 문화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 후에 다시 대원사 아니 길상사에 가지 않았으니 벌써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면, 아니 그분이 자야
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눈이 푹푹 오는 걸까? 정말 그럴까?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뀌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