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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

윤의사 2015. 4. 12. 16:15

일본의 ‘독도 침탈’과 ‘성노예 왜곡’에 이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로 역사의 왜곡이 계속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 통치하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만들어 한반도 남부 지방을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313년 한반도 북부에 유지되었던 한사군과 일본의 임나일본부로 한반도에는 고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주장인 것이다. 유물 설명 뿐만 아니라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역사> 교과서에서도 ‘임나’라는 표현이 보이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된 주장임을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일본은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가 4∼6세기경 존재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호는 8세기 이후에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양국 학자들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합의까지 했다.

둘째, <일본서기>의 잘못된 내용을 식민지 시절에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즉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것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자, 의자왕이 각지에 원병을 요청하는 가운데 일본에도 요청하여 백제에 보낸 원병을 밑바탕으로 한 허구로서 19세기 말 <일본서기>를 정한론자들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나아가 630년까지 임나일본부가 존재하면서 야마토조정에 조공을 하였다는데, 마지막 가야인 대가야는 진흥왕23년(562)에 정복되었으므로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있다.

셋째, 문화 발전에서 일본은 전혀 한반도와 싸울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에 신무기라고 할 수 있는 철기 문화를 일본이 본격적으로 생산한 시기는 5세기를 전후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신무기인 철기 문화의 발전에 있어 일본은 삼국을 대적하기에는 아직 걸음마 수준인 것이다.

 

일본의 임나일본부를 처음으로 반박한 사람은 1963년 김석형 선생이다. 논문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이라는 논문에서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일본 열도에 존재했다. 일본열도에 이주한 삼한·삼국의 주민들이 각각의 고국을 상징하는 분국을 세웠고, 그중 가야인의 분국이 바로 임나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는 임나일본부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의 큐슈를 지배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독도와 ‘성노예’왜곡에 대해 기껏해야 일본 대사나 공사를 초치하여 항의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세계를 향하여 자신들의 주장의 합리성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외교 당국자나 교육부에서는 일본보다 더 많은 자료를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하여 세계를 상대로 한 홍보에 앞장서야만 세계인이 제대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