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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교도소가 개방형 교도소?

윤의사 2008. 2. 9. 11:42

고조선 이래로 우리나라에서는 감옥이라는 장소를 만들어 죄인들을 백성들과 따로 격리하여 가두었다. 고조선에서 ‘8조금법(八條禁法)’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감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감옥은 높은 돌담을 빙 둘러싼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감옥터도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죄인들이 머무르는 감옥에 대하여 임금이 많이 신경을 썼음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나타내고 있다. 태조 7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2월 24일(무자)에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다 석방하였으니, 천변(天變) 때문이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령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감옥이 더럽고 수리하지 아니하여, 무더위와 모진 추위에 병이 들어 비명에 죽게 되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그 곳 관리로 하여금 때때로 돌아보고 깨끗하게 하도록 하라.” 라고 나와 있으며,

영조 37권, 10년(1734 갑인 / 청 옹정(雍正) 12년) 3월 26일(임인)에 ‘하교(下敎)하기를,

“영오(囹圄)를 깨끗이 쓸게 하는 것은 고례(古禮)에도 있다. 더구나 근래에는 국수(鞫囚)가 없는 달이 없어 영오를 깨끗이 쓸 때가 없었으나, 지금은 국사(鞫事)가 이미 완료되었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즉시 깨끗이 쓸게 함으로써 감옥을 깨끗하게 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하였다.’라고 나와 있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대한제국말에 서울의 감옥(서린옥: 瑞麟獄)의 구조는 신라시대의 감옥과 같은 원형 구조에다가 감옥의 왼쪽은 겨울용의 온돌방이었고, 오른족은 여름용의 마루방이었다. 이것은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한 마루방으로 옮겨주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으로 옮겨주었으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관리가지 모두 죄수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주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서린옥에서는 복역 성적이 좋거나, 복역 날짜를 거의 채워가는 수감자들에게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법무부 소속의 몇몇 교도소에서 실시하고 있는 ‘개방형 교도소’라고 할 수 있다. 수감자들은 바깥 나들이를 할 때 감옥 안에서 만든 짚신이나 미투리를 들고 나와 시장에다 팔아 짚이나 왕골, 삼과 같은 짚신 재료들을 사가지고 감옥으로 들어왔다. 감옥으로 들어오던 수감자들이 알뜰하게 돈을 모으기도 하였지만, 일부 수감자들은 감옥으로 들어오면서 술을 마시고 감옥문을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라고 외치다가 관리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하였다.

오늘날처럼 높은 담으로 둘러 쌓이면서 햇볕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감옥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이다. 일본은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순종황제를 즉위시켰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의 처사에 항의하는 정미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은 의병전쟁을 일으키는 우리 민족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조선시대에 쓰던 감옥으로는 그많은 수감자들을 가두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일본의 침략의 상징이자 독립운동 탄압의 온상인 서대문형무소이다. 사방으로 밀폐되어 got빛이라곤 도무지 볼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 독립 투사들은 거의 병에 걸려 나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끈질긴 저항 정신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