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옛날 공중전화는 관리가 늘 감시

윤의사 2007. 9. 18. 20:00

오늘날 사람들은 집안이건 밖이건 간에 걸어 다니며 전화를 할 수가 있다. 즉 휴대폰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므로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이나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 설치되어 있던 공중전화가 쓸모가 없어져 한국통신에서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전화는 1876년 미국인 벨에 의해 발명되어 통신 혁명을 가져왔다. 전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사용되던 모오스가 발명한 복잡한 기호로 이루어진 무선전신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도입된 것은 1882년 상운이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1896년에 가서야 실제 사용이 가능해졌다. 1902년 3월 20일 통신 업무를 관장하던 한성전화소가 서울과 인천 사이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면서, 나라에서 전화를 사용한 지 6년 만에 백성들도 전화를 쓸 수 있었다. 공중전화를 설치하면서 한성전화소는 전문 2조로 된 ‘전화권정규정’을 발표했다. 전화통화료는 5분간 50전이고, 다른 사람이 전화를 하려고 기다릴 때에는 10분 이상 통화할 수 없다 ‘전화권정규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 법령이다. ‘텔레폰(Telephone)’의 한자음을 따서 ‘덕율풍(德律風)’, ‘덕진풍(德津風)’, ‘전어기(傳語器)’라고 불린 당시의 전화기는 너비 50CM, 길이 90CM쯤 되는 붉은 판에 붙인 벽걸이식으로 송화기와 수화기가 분리되었으며, 송화기관에 신호를 돌리는 손잡이와 딸딸이가 붙어 있었다. 한성전화소에서는 공중전화기 옆에 ‘덕율풍 감사(監使)’라는 관리를 앉혀 놓고 사용자가 통화 중에 싸우거나 예절에 어긋난 농담을 할 때는 통화를 중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통화자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 때는 공손하게 절을 하고 받는 등 예의바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한성전화소는 공중 전화뿐만 아니라 양반 부잣집을 다니며 전화 가입을 권장하였다. 하지만 ‘신문물은 곧 일본의 침략’이라는 생각이 넓게 퍼져 있어서 거부감이 있었으므로 12명 정도 가입하는데 그쳤다. 전화기는 3년상에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바로 순종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은 자기 아버지인 고종이 죽었을 때 3년 동안 매일 아침에 전화를 걸어 곡을 했다고 한다. 먼저 내관이 송화기에 대고 홍릉으로 신호를 보내면 능지기가 수화기를 봉분 앞에 갖다 대었는데, 이렇게 준비가 갖추어지면 순종이 곡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우리 조상들의 한 모습일 것이다.

 

--이 글은 한국교육신문에 연재 중인 기고문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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