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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

윤의사 2007. 7. 21. 22:39

우리의 옛 법에는 ‘공소 시효’란 것이 없었다. 인과응보의 사상 아래 죄를 지은 사람은 언제든지 죄 값을 치러야 하고, 공을 세운 사람은 시기가 아무리 흘러도 공을 인정해 주는 신상필벌이 분명했다.

영화 ‘그 놈 목소리’로 공소 시효에 대한 말이 많았습니다. 공소 시효란 어떤 범죄 사건이 일정한 기간의 경과로 형벌권이 소멸하는 제도로 형사 시효의 하나입니다. 공소 시효 기간은 범죄의 경중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며 최대로 공소를 제기한 때부터 15년을 경과하면 공소 시효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우리의 옛 법에는 ‘공소 시효’란 것이 없었다. 예를 들어 성종 10년(1479)에 질투가 심한 성종비 윤씨를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하여 폐출했다가 다음 해(1480)에 사사(賜死)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25년 후 연산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폐비가 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미 고인이 된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 참시했다.

또한 영조 때의 경상 관찰사였던 황인검은 남편의 무덤가에서 강간당하고 피살된 소복미인(素服美人)의 살해범을 30년 만에 잡아 사형에 처했다. 그러므로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사상 아래 죄를 지은 사람은 언제든지 죄 값을 치러야 하고, 공을 세운 사람은 시기가 아무리 흘러도 공을 인정해 주는 신상필벌이 분명했다 할 수 있다.

보증금을 납부시키고, 도망하거나 기타 일정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이것을 몰수하는 제재조건으로 법원이 구속된 피고인을 석방시키는 제도를 보석이라고 한다. 보석으로 석방되어도 구속 영장의 효력은 그대로 존속하고, 다만 그 집행이 정지된다는 점에서 구속의 취소와 구별되고, 일정한 보증금을 조건으로 하는 점에서 단순한 구속의 집행정지와 다르다.

조선시대에도 죄인에 대한 보석제도가 있었다. 태조 때에는 병에 의하여 유양이라는 사람을 병보석으로 풀어 주어 정부 관리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또한 태종 때에는 사형수도 보석금이라고 할 수 있는 속전(贖錢)을 받고 감형을 시켰으며, 세종 때에는 기온의 갑자기 내려가자 추운 겨울을 보낼 대책이 없어 죄인들을 석방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 5년(1423)에는 보석제도를 폐지하기도 하였지만, 예외 규정을 두어 문무 관리와 3품 이상의 아버지 때문에 관리가 된 음서 출신의 자손들은 국가에 대한 모반(謀反)·임금에 대한 반역·반란의 도모·악역·도를 어긴 부도·임금이나 웃어른을 공경하지 않은 대불경·부모에 대한 불효·형제, 친구간의 불화·의롭지 못한 불의·내란 등의 십악에 속하거나,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였거나, 도둑의 훔친 물건을 받은 것 이외의 태형과 장형은 모두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세종 7년(1425)에 제정된 보석금에 대한 규정을 보면 귀양을 3년간 하면 동전 6천 꿰미에 저화 3천장을, 장 6백에 귀양 3천리면 동전 9천 꿰미에 저화 4천5백장을 보석금으로 내야 했다.

우리나라는 보석뿐만 아니라 사면 조치도 이루어졌다. 오늘날 국경일이나 대통령의 취임식에 맞추어 사면·복권조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옛날에도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에는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이 글은 제가 요즘 한국교육신문에 기고한 글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