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같은 언어를 썼을까, 아니면 다른 언어를 써서 서로 대화할 때마다 통역관이 필요했을까?
본래 한국어는 알타이어에서 발생해 원시 한국어로 발전했으며, 여기에서 신라어와 백제어는 원시 한국어로, 고구려어는 원시 부여어로 분화되었다. 삼국 모두 언어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문법이나 조어 방법이 같았다. 다만 일부 어휘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구려와 백제 지배층의 언어는 같았으며, 백제 하층민의 언어와 신라의 언어 또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 지배층의 언어가 한 뿌리라는 사실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내용으로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재위:413~491)편에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투항한 만년(萬年)과 걸루(桀婁)라는 장수가 나오는데, 이 두 장수는 투항 즉시 대모달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대모달은 고구려의 무관으로서는 최고 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대당주(大幢主)라 부르기도 하였다. 만일 이 두 장수의 모국어인 백제어가 고구려의 언어와 서로 통하지 않았다면 투항하자마자 이렇게 높은 직책을 맡아 부하 사병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편을 보면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道琳)이란 승려가 백제로 잠입한 내용이 있다. ‘도림은 죄를 짓고 도망쳐 온 것으로 위장하고 백제로 잠입했다.’는 내용이다. 사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면 도림이 백제로 잠입하기 전에 오랫동안 언어 학습을 했어야만 했는데,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 백제의 지배층은 물론이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하층민까지도 고구려와 언어 소통이 원활해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의 지배층은 고구려와 같은 부여 계통으로 언어가 고구려와 유사했거니와 점차 백성들까지도 표준어라고 할 수 있는 지배층의 언어를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 하층민의 언어와 신라의 언어가 같았다는 것은, 현존하는 최초의 향가로 알려진 <서동요(書童謠)>를 보면 알 수 있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재위:600~641)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라의 서라벌에 퍼뜨린 향가로, 백제 사람인 그가 신라의 노래인 향가를 지어 부른 것으로 보아 신라와 백제가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신라의 진평왕이 여러 명의 공인(工人)을 백제에 보내어 일을 도왔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서로 언어가 잘 통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간에는 백성들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백제처럼 활발히 오고가질 않앗다. 어휘에도 약간 차이가 있어 ‘산(山)’을 신라-백제에서는 ‘모리’, 고구려에서는 ‘달’로 발음했고, ‘바다’는 신라에서는 ‘바 ’, 고구려에서는 ‘나미’로 발음했다.
어쨌든 신라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는 언어가 오늘날의 남한과 북한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눈에 띄는 언어 통일 정책을 실행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삼국 사이의 언어에 이질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언어 통일 문제 또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는 일본과도 의사 소통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 특히 백제인의 일본 왕래가 잦았으며 백제인이 일본 지배층을 이루었던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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