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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여성 교육

윤의사 2008. 2. 24. 13:48
우리나라 여성의 지위는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 사상에 의해 피해를 받아 매우 차별적 교육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엄격한 아버지 중심의 가정으로서 모든 결정이 남성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부인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잘 봉양하면 되었다. 여기에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옛 말에 따라 여성의 교육은 뒷전이었다. 남자의 교육 기관은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과 향교,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서당 등 모든 시대에 나타나고 있지만 여자의 교육 기관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의 교육은 주로 안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교육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남자의 심부름꾼을 양성하는 교육, 즉 옷을 만들고 밥을 짓고 집안 일을 하는 방법 등이었다. 또한 여기에 열녀, 효부가 되는 데 필요한 교육과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지혜를 어머니에게 배웠다. 다시 말해 규방교육(閨房敎育)이 전부였던 셈이다. 또한 여자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여 일곱 살 이후의 남녀는 구별을 엄격히 한 윤리관 때문에 일찍부터 남자와 어울릴 수 없었으며 바깥 출입의 자유가 구속되었다. 따라서 외출을 할 때 가마나 쓰개 치마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므로 비록 여성 교육 기관이 있었다 하더라도 배우러 다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부 양반집의 여자들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나 《소학》사서를 읽기도 했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양반 출신의 여성 작가가 신사임당(申師任堂)이나 허난설헌(許蘭雪軒)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 거의 모든 여성은 글을 모르는 문맹이거나 한글을 겨우 깨치는 정도였다. 그래서 한글을 암클, 안방글이라고 했던 것이다. 여자의 교육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서구 사회보다 거의 백 년이나 뒤진 19세기 말엽으로, 여자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짐과 아울러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분야에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내린 우리나라에서는 쉽사리 여학교 설립을 이루지 못해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먼저 이 땅의 여성 교육에 착수했다. 1885년에 미국인 스크랜턴여사가 선교사로 임명된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인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들에게 학교 교육을 실시했다. 이 학교의 설립 당시에는 여성 교육을 기피하는 전통적인 관념과 서양인에 대한 배타성 때문에 학생 확보가 어려워 단 한 명의 여성으로 개교했으나 이듬해 학생수가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명성황후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려 주어 오늘날의 이화학교가 되었다. 이 때부터 서서히 여성 교육 기관이 생겨났는데, 진명학교․숙명학교․정신학교․배화학교가 대표적이다. 이 때도 남자와 여자는 엄격히 분리되어 남녀 공학은 한 곳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