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우리나라의 볼거리

장보고의 유적 완도를 찾아서

윤의사 2006. 3. 15. 20:00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전,

우리 나라에서도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를 연결하면서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무역권을 확대하면서 바다의 왕으로써 해상 무역 왕국을 건설한 영웅(英雄)이 있었다. 바로 완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장보고장군이다.

 영웅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6시간에 걸친 여정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 채 해남을 거쳐 완도대교에 이르렀다. 넓게 펼쳐진 남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파도를 향해 호령하던 장보고장군을 생각해보았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읍내를 향해 11KM를 가다보면 장좌리가 나온다. 원래 장보고장군이 있었던 곳이라고하여 장재리이었으나, 장좌리로 바뀐 곳이다. 모방송국에서 방영된 ‘해신’이라는 드라마로 인기를 끌고있는 드라마세트장이 설치되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알게 해주어 더욱 뜻이 깊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드라마가 끝나면 관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장재리 마을 건너 장보고장군의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장도가 나타났다. 아마 장보고장군이 있던 섬이라 장도가 아닐까 한다.

 장도는 장진성으로도 불리며, 물이 빠지는 썰물때에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180M쯤 되는 거리였다.

 청해진에 대한 발굴작업이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되었다. 장도에는 내성과 외성의 흔적이 보이며, 외성은 진흙과 자갈을 섞어 다져 쌓은 판축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와 철제 무기, 그리고 도자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생산된 청자 조각들이 나와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섬주위에는 방어용으로 통나무로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서양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성둘레에 설치했던 작은 개울 모양의 해자라고 할 수 있다.

 장도꼭대기에는 동그란 모양의 숲이 있다. 숲속에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송대장군당으로 불리고 있다. 호가 송대인 장보고장군을 모신 것이지만, 이전에는 송징이라는 사람의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다. 송징은 고려시대 몽고에 항복한 고려 정부에 대항하여 삼별초가 항몽투쟁을 벌였을 때 진도로 내려온 배중손을 도왔으며, 어려운 완도 백성들을 많이 도와주었던 장군이라고 한다. 그래서 송징을 모셨지만, 실제 살았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여, 몇 해전부터 장보고장군과 장군의 친구인 정년, 그리고 송징을 함께 모셔놓고 제사(祭祀)를 지낸다고 한다.

 당제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을 전후해서 지낸다. 새벽에 물이 빠져나가는 틈을 타서 걸어서 당집까지 간다고 한다. 북과 꽹과리 등 악기(樂器)를 연주하며 ‘청해장군 장보고’기를 앞세우고 장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섬주위를 세 바퀴를 돈 후에 섬꼭대기의 당집으로 간다. 이곳을 다시 세바퀴 돌면, 해가 뜰 무렵이 되는데 이때 선출된 제주 등이 당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주는 음력 1월 3일에 뽑는다. 본인의 뜻에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선출하는 제주는 상을 입은 사람이나 자식을 잃은 사람은 안되고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주가 되면 담배나 술을 금해야 한다. 1월 7일부터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상황봉 계곡의 샘물로 목욕을 해야만 했으나, 오늘날에는 손발을 씻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화장실갈 때 신는 신발과 일상 생활에서 신는 신발을 구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

 제사에 필요한 비용은 마을에서 공동(共同)으로 걷는다. 음력 1월 14일에 제주집에 모여 음식을 준비한다. 제사는 장보고장군의 혼령을 위로하면서 자신들의 소원과 풍년, 풍어를 기원(祈願)한다. 제사가 끝날 때가 되면 장도 주위에는 밀물 때문에 바닷물이 차있다고 한다. 그러면 배를 타고 장좌리로 돌아와 마을의 우물에서 굿을 하고 활터에 가서는 소원을 비는 사정굿을 한다. 굿이 끝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집안의 평안(平安)을 빌어주는데, 이를 맞은 집에서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니 마을의 가장 큰 축제(祝祭)라고 하겠다. 장보고장군의 당제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마을 제사로서 마을 주민들이 서로 화합하고 앞날의 행복(幸福)을 비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현실에 부러운 느낌이 들었다. 

 완도에는 장보고장군이 활약했던 곳이라 장군과 관련된 유적(遺蹟)이 많았다. 장보고장군은 신라의 유학생과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의 산동성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지어, 다른 나라에서 겪을 지도 모르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신라 사람끼리 모여 풀도록 하였다. 이 법화원을 본떠서 완도에도 지었으나, 지금은 터만 전하고 있다.

 장보고장군은 바다의 도둑들인 해적이 나타나면 배를 출동시켜 잡아들였다. 해적의 숫자가 많자, 감옥을 만들었으나, 역시 터만 남아있는 ‘옥당터(獄堂터)’, 청해진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준 ‘청해정터’, 그리고 장보고장군 가족들의 무덤으로 전하는 ‘장보네 묘’가 있다. 그러나 ‘장보네묘’는 염장에 의해 죽음을 당한 장보고와 이에 대한 반발로 난을 일으킨 부하 이창진 등이 신라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청해진에 있던 백성들은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벽골제로 강제 이사(移徙)를 하였으니, 끝내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이 많았으니 장보고장군과 가족의 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어 단지 전설상의 무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해상 무역의 영웅을 존경하는 완도 사람들이 무한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장보네묘는 바다를 개척하려는 완도 사람들의 영원한 희망(希望)이었을 것이다.

'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 우리나라의 볼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개토대왕 유적을 찾아  (0) 2006.06.25
삼별초의 항쟁지  (0) 2006.03.16
안용복장군유적을 찾아  (0) 2006.03.14
임꺽정을 만나다  (0) 2006.03.12
거제도  (0) 200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