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3월3일 오늘의 역사, 대조선독립단 창설

윤의사 2025. 3. 3. 10:49

1919년 3월 3일은 박용만(1881~1928)이 하와이에서 '대조선 독립단'이 창립하였다.

박용만은 안창호, 이승만과 함께 일제강점기 재미 한인사회를 이끌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박용만은 고종 18년(1881) 윤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중리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관립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유학 시절 만난 박영효와 활빈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01년 3월 안국선, 오인영 등과 귀국하면서 체포돼 옥고를 치르던 중 중국에서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의 영향으로 한국의 량치차오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04년 '일본에 의한 황무지 개간 추진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가 '한성감옥'에 투옥돼 이승만, 정순만을 만나 결의형제를 하였는데, 후일 3인의 이름 끝 자인 ‘만’을 따 ‘3만’으로 불렸다.

출옥 후 1905년 미국의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ROTC 과정을 이수한 후, 1910년 네브래스카주 커니쉬의 한 농에서 해외 최초의 독립군 장교 양성기관인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웠다.

1914년엔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을 만들고, 1919년 3월 3일 '대조선 독립단'을 조직하여, '무력시위를 통한 독립'을 주장했다.

1919년 8월 경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조선 국민군' 확장을 추진하고, 1921년 4월엔 중국 북경에서 무장투쟁 단체를 통합하는 '군사통일 회의'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성과가 미미하자 중국에서 둔전병제를 도모하는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한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김규흥과 함께 11월 4일 한중 합작으로 흥화실업은행을 창립하면서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독립된 조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항일투쟁에 대해 외교에 의한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과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그의 '무장투쟁 노선이 엄청난 자금이 드는 비현실적인 노선'이라고 하였다. 이 영향으로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되지만 취임하지 않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이승만이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박용만은 '무장 투쟁을 위한 안정적 재정 확보'를 위해,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박용만의 활동에 일제의 이간책까지 작용해 '밀정(?)'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1928년 10월 17일 중국의 톈진에서 이해명에 의해 피살되니 47세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사진: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