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3월1일 오늘의 역사, 3.1운동

윤의사 2025. 3. 1. 11:10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18년 1월 8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총 14개 조항의 '평화 원칙'을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전쟁을 방지할 목적으로 국제연맹을 결성하고, 민족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한다는 '민족자결주의가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의 식민지에 관한 것으로 승전국과는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독립지사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이때  '고종 황제의 독살설'이 나오면서 반일사상이 널리 퍼지며 항일운동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용운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한용운의 '공약삼장'을 작성하고, 고종황제의 장례일에 맞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3개 교단이 주축이 된 민족대표 33인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현재의 태화빌딩에 있었던 '태화관'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선언하면서 '일본에 대한 독립 청원'과 함께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 원칙'도 밝혔다. 33인은 독립선언 직후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일본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9명, 4명은 선약(?)이 있었다는데...

​33인의 독립선언과 함께  3월1일 정오, 서울의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운동가인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을 낭독하였고, 평양, 의주, 원산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3.1만세운동은 3개월 지속되어 5월까지 이어지며 200만 명이상이 참여했다. 해외에서도 간도와 연해주, 그리고 미주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비폭력, 평화적인 만세시위에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을 해 약 7,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1 운동'은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따라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려 주목을 받게 되엇다. 또한 일제의 무단통치가 한국인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문화정치로 바뀌게 되었다. 3.1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독립과 자주성을 나타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