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월5일 오늘의 역사, 서재필 선생 세상을 떠남

윤의사 2025. 1. 5. 11:31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정치가로 조국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로, 특히 <독립신문>을 펴내 자주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 사상을 드높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조국의 독립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호는 송재이다.

 

서재필은 18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서울에 올라와 외삼촌 집에서 공부하였고, 개화파인 김옥균, 서광범 등과 가깝게 지냈다1881년에 신사유람단에 참여해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운 데 이어, 영선사에 뽑혀 청나라에 가서 군사 기술을 배웠다. 또한 국방을 근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일본의 도쿄 도야마 육군학교에서 신식 군사 기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서재필은 하루빨리 나라를 개화시키고 싶어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하고 온 가족을 잃었다. 1885년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막노동을 하며 의과대학을 마치고, 서른 살 나이에 한국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다.

 

<독립신문>을 펴내 개화와 독립 운동에 힘을 싣다

1895년에 서재필은 고국으로 돌아와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펴내 국민을 일깨우고,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며 바로잡는 데 앞장섰다. 이어 이상재,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어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을 조직적으로 해 나갔다.

특히 청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청나라 사신들이 머물던 모화관 자리에 독립관을 세워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자주 열었다. 일반 시민들이 참가하는 민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도 열어 국민의 개혁에 대한 열망을 국와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힘을 키워 가자, 겁이 난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개혁 운동의 지도자였던 서재필은 1898년에 다시 미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전 재산을 털어 조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잡지 <더 이브닝 리더>의 협력을 받아 한국의 독립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제를 비난하였다. 또한 교포들의 힘을 한데 모으기 위해 한인 친우회를 조직하고, 친분 있는 미국인들을 모아 한국 독립 후원회를 만들었다.

한편 서재필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위원장이 되어 <인디펜던트>라는 영자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열린 워싱턴 군축 회의에 독립을 요청하는 글을 제출하였다. 도한 하와이 호놀룰루의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세계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독립 후 1947년 귀국하여 미국의 군정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51년 1월 5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대문 역사관 앞의 동상
독립문, 앞의 기둥 두개는 영은문 터
독립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