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제2연평해전

윤의사 2024. 6. 29. 14:13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열기와 튀르키에와의 3,4위전이 열리던 2002년 6월 29일 10시 25분,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1.1km  침범한 2척의 북한 경비정을 저지하기 위해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출동했다.

북한 경비정에 경고방송과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한 차단기동을 시작했다.

차단기동은 해군에서 '밀어내기 작전'으로 불리는데, 김대중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남하하는 북한 함정을 우리 함정으로 밀어내기 위한  '몸싸움'이라 하겠다. 북한과의 전쟁을 막기위한 교전수칙이었지만, 제2연평해전처럼 기습공격을 하면 당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밀어내기 작전을 하다보면 적과의 거리가 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최고의 해군 명장이었던 이순신 장군도 절대 근거리 전투는 하지 않았다. 적의 배를 충돌해 부숴버리는 당파도 거북선이외에는 절대 왜선 가까이 접근하지 않도록 했다. 이순신 장군이 근거리에서 싸운 유일한 전투가 노량해전이며, 결국 왜군의 총탄에 전사한 것이다.그만큼 위험부담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작전을 전개하라고 한 당시 정부는 우리 병사들의 목숨을 경시한 것이었다.

500년 전 이순신 장군의 전략만도 못한 작전을 펼쳤으니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측이 부담해야만 했다.

 

북한 경비정( PCF) 684호(215 t)이 가는 방향을 횡으로 가로지르자 북한 경비정이 358호를 지나친 순간 갑자기 속력을 줄이다가 정지했다. 358호를 뒤따르던 357호는 갑자기 정지한 북한 경비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하게 방향을 바꾸면서 357호의 좌현이 그대로 북한 경비정에게 노출되었다.

이때  북한 경비정은 경고 사격도 하지 않고 85mm 전차포를 357호를 겨냥해 포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37mm 포탄이 함교에 명중되면서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 기기가 파괴되어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358호는 앞을 가가린 357호 때문에 즉각 사격을 하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이동 후 포격을 시작했다. 북한은 357호를 집중 공격하여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6명이 전사하고, 현 국가보훈부 이희완 차관(당시 중위)를 비롯한 18명이 부상을 당했다.20여 분 계속죈 전투에서 북한은 684호 경비정이 파손되고, 13명 전사, 25명이 부상당했다. 

1999년 6월의 ‘연평해전’ 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북한이 교전을 한 것이었다. 

제2차 연평해전을 계기로 해군에서는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 이남으로 남하했을 때 교전규칙이 기존의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소극적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의 3단계 적극적 응전 개념으로 변경되었다.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면서 유비무환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사진:전쟁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