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현충사

윤의사 2024. 6. 5. 20:00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목포에서 인천까지 서해안 고속국도가 건설되었다. 고속국도를 달리다 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다를 가로지른 서해 대교와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부분 관리의 반대에도 12척의 배를 가지고도

바다를 지키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미래를 보는 혜안이 보이는 듯 했다. 장군이 바다를 중시했듯이 오늘날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하니 말이다.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에는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다. 숙종 32(1706)에 이 고장 선비들의 힘으로 사당이

세워졌고, 다음 해 왕이 현충사란 현판을 내렸다.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잠시 쇠락했으나,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국민들의 뜻을 모아 193265일에 다시 지어졌다. 오늘날처럼 현충사가 성역화된 것은

1966년 이후이며,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충사의 중심은 꼭대기에 있는 현충사이다. 청기와 집으로 된 사당 현충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정창섭, 문학진 작가의 작품으로 장군의 일생이 담긴 십경도가 있다. 그중 부산해전에서 승리는 왜군들의 서해 진출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서해진출로의 봉쇄로 왜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왜군은 곤경에 빠져 점차 전쟁의 주도권을 조선이 차지하게 되었다.

현충사 서남쪽 아래에는 유물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이자 국립 박물관으로 20114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공식 개장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중에 쓰신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칼, 가족과 친척에게 보낸 편지인 서간첩이 있다. 칼은 15944월 한산도 진중에서 태귀연, 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크기가 197.5cm나 되고, 비천상 무늬와 자신의 의지를 시로 나타낸 시구가 있다.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이 밖에 임진왜란 때 쓰던 무기인 비격진천뢰, 조총, ···황자포 등의 대포, 화살, 거북선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발길을 장군이 사시던 집으로 옮겼다. 미음자() 형으로 된 기와집인 장군의 집은 현충사가 성역화되기 전인 1966년까지 후손들이 살았다. 아담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던 장군의 숨결이 느껴지는 집이다. 이 집은 원래 처가이었으나, 부인 방씨가 외동딸이었기에 충무공의 후손들이 살았다. 집에서 동쪽으로 50미터쯤 가면 장군께서 궁술을 연습하던 활터와 기마술을 갈고 닦은 기마장이 있다. 활터에서 동쪽으로 가니 셋째 아들 이면공의 무덤이 있다. 장군이 남해안에서 일본군을 계속 무찌르자, 일본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아산에 있던 장군의 가족을 볼모로 잡으려고 했다. 이때 가족을 돌보던 셋째 아들 면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음을 당했다. 아들의 죽음을 안 장군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으니, 나라를 구한 성웅이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현충사와 생가
현충사에 있는 십경도 중 부산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 장군의 모습이다.